로트만에게는 ‘상징적
인 것 혹은 기호적인 것’이 자아 형성을 위한 본질적인 전제가 된다. 그들에게 내
부 혹은 무의식의 영역과 외부 혹은 의식의 영역은 질적으로 단절된 별개의 두 영
역이 아니라 ‘상호 대화/번역 가능한’ 두 영역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 ‘프로이트주의’와의 논쟁에서 바흐친의 주된 논점은
자기폐쇄적인self-contained모델, 곧 ‘영혼의 선장’으로서의 자아라는 개인 모델에
대한 거부였다. 바흐친은 개인 심리를 한 인격체의 ‘내부’에 가두는 것에 반대하
고 그것을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사건으
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회적 존재도 자신의 경계 내에 갇혀 있
지 않다. 그것은 유기체와 외부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계적boundary 현상이
다: “인물들은 주관적인 내부 영토를 지니지 않으며, 전적으로 언제나 경계 위에
있다.”1 때문에 (프로이트처럼) 문제의 해답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잘못된
것이다. 심리는 결코 한 인격체 ‘안’에 자리해선 안된다. 나의 뇌는 내 속에 있지
만 나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주관적 심리는 유기체와 외부영역 사이의 어떤 지
점, 즉 두 현실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상에 위치해야만 한다.”2
한편, 바흐친/볼로쉬노프에 따르면, 유기체와 외부 세계의 경계선상에서 발생하
는 이런 만남(접촉)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메타언어학적인 것, 곧 ‘기호적인
semiotic’ 것이다. “유기체와 외부 세계는 이 경계영역에서 기호를 통해 만난다. 심
리적 경험이라는 것은 유기체와 외부환경과의 접촉을 기호에 의해 표현한 것이
다.”3 따라서 당연히 내적 심리는 ‘사물’로서 분석될 수 없고, 오직 ‘기호’로서 이
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4
정리하자면, 바흐친에게 자아 혹은 의식은 그것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더 나아가 의식과 무의식은 ‘기호’를 매개로 한 이런 상호작용 속에
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지적할 것은 자기충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인 자아 모델은 로트만에게서도
역시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로트만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것은 곧 ‘기호계 속
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호계의 개념은 본질상 ‘고립’의 가능성을 배제
한다. 기호계 개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립된 정적인 체계가 원칙적으로 불가
능하다’는 점이다. 즉 그것이 가정하는 공리는 개인적 의식을 포함한 “모든 체계
는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 ‘언제나 이미’ 기호계라는 일정한 기호학적 공간연속
체에 잠겨있어야만 한다.”7는 것이다. 체계는 결코 고립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
며 개별적으로 기능하지도 않는다. 체계들은 “서로 다른 구성 단계에 놓인 다양
한 유형의 기호 형성물로 가득 차 있는 모종의 기호연속체에 적재됨으로써 비로
소 기능할 수 있게 된다.”8
요컨대 바흐친에게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자아의 형성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면, 로트만에게는 ‘상징적인 것 혹은 기호적인 것the Symbolic/Semiotic’
이 자아 형성을 위한 본질적인 전제 조건인 셈이다.
>>난 로트만의 논의를 자세히 더 봐야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로트만도 깠구나ㄷㄷ 그 유아 성충동
로트만은 ‘과연 성적 모
티브가 유아의 심리생리학에 그토록 근원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오이디푸
스 콤플렉스’는 성적 모티브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적 코드변환semiotic transcoding’
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로트만이 보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린 아이가
복잡한 어른 세계의 의미론적 모델(즉 “대문자 알파벳으로 된 텍스트”)을 훨씬 단
순한 유아 세계의 의미론적 모델(즉 “소문자 알파벳으로 된 텍스트”)로 ‘번역
перекодировк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번역의 불가피
한 결과가 바로 축약рерукция이다.10 아무리 초기 단계일지라도 아이의 세계는 고
립된 자족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른의 언어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며, 그것
의 계속적인 영향을 받는(즉, 침투를 받는) 세계다. 말하자면, 로트만에게서도 아
이의 세계, 그러니까 내부 혹은 무의식의 영역과 어른의 세계, 외부 혹은 의식의
영역은 질적으로 단절된 별개의 두 영역이 아니라 ‘상호 번역 가능한’ 두 영역으
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두 영역 간의 ‘완벽한’ 번역은 절대 불가
능하다).
>>로트만 쩐다ㄷㄷㄷㄷㄷㄷㄷㄷㄷ
3. 로트만의 자기커뮤니케이션: 인격의 재구성과 통사론적 축약
자기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문화 체계 속의 커뮤니케이션의 두 모델에
관하여」(1973)에서 로트만은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나-그/녀 커뮤
니케이션’ 유형과 구별되는 일종의 구조적 대립항으로 주체가 정보를 그 자신에
게 전달하는 경우인 ‘나-나 커뮤니케이션’ 유형을 내세운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체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축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한사람에서 다른 사람
으로 전달되는 기지(旣知)의 정보를 다루는 반면 (...) 두 번째 경우는 정보의 증대,
변형, 다른 범주들 속에서의 재정식화가 논의 대상이 된다 (...) 이때, 정보의 발신
자와 수신자는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24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떤 정보를 나 자신에게 다시 전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로트만은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을 ‘자기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른다. 일종의 정보적 역설에 해
당하는 이런 경우는 표면적인 역설에도 불구하고 결코 드물지 않고, 오히려 문화
의 보편적 체계 안에서 아주 커다란 기능을 행하고 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자기커뮤니케이션의 예로는 ‘메모’가 있다. 가령 중요한 일정이나 계획을 미
리 달력이나 수첩에 적어놓는 경우, 나는 (미래의) 나에게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특정한 정보를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 상태를 좀 더 명료하게 만들
기 위해(즉,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 종이 위에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끄적이는
경우 또한 새로운 정보를 첨가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시 곱씹는
자기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한다. 한편, 메모의 목적이 이후에 상기하기 위함이 아니
라 어떤 비밀스런 메시지의 전달에 있는 경우, 그것은 일종의 비밀 메시지, 즉 지
정된 수신자만 알아볼 수 있도록 특별히 코드화된 정보에 해당한다. 군대에서 암
호를 사용해 피아를 식별할 때 같은 암호를 사용하는 동료는 사실상 이미 나와
한 몸인 것으로 여겨진다.25
하지만 로트만은 이와 같은 ‘기억술적(mnemonic)인 기능’은 오히려 부차적이며,
자기커뮤니케이션의 보다 중요한 기능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새
로운 정보의 창조’다. 자기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 역할은 문화적인 것인바, 그것
은 새로운 정보를 발생시킨다. 나-나 체계의 경우에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메
시지가 ‘질적으로’ 재구축되는바”, 이로써 새로운 의미가 획득된다. 즉 원래의 메
시지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재코드화됨으로써 새로운 메시지의 성격을 획
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이 개
념이 메시지의 ‘질적’ 변화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주체의 ‘인성личность’의 변화
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로트만에 따르면, “그/그녀가 그 자신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동안 발신자는 넓게 보아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재구축한다. 왜냐하면 인성의
본질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코드들의 개인적인 목록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바로
이 목록이 소통의 과정 중에 변화하기 때문이다.”26
커뮤니케이션 과정 중에 있는 주체의 ‘인성을 재조직화’하는 것, 즉 그의 자기-
이해를 변경시키는 것은 나-나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그리
고 바로 그 점에서 이 개념은 ‘자아 모델’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로
트만에 따르면, “나-나 채널을 따르는 소통은 절대로 자기-폐쇄적 과정으로 볼 수
없는” 바,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에서의 부가적인 코드의 도입, 즉 전체 맥락을 변
화시키는 외적 ‘자극’의 결과이기 때문이다”27 바로 이 외적 코드들, 자신의 고유
한 의미론적 하중을 지니지 않은 채 외부에서 도입되는 통사론적인 부가 코드들
이 본래의 메시지와 결합됨으로써, 자기커뮤니케이션을 작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자기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로트만의 설명은 내
적 발화의 ‘형태적 특징’으로서의 생략과 압축, 혹은 ‘경제성’이라는 바흐친의 앞
선 설명을 따르면서, 그것을 더욱 더 명시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보
면 로트만은 여기서 1920년대의 바흐친/볼로쉬노프, 그리고 비고츠키가 가설적 명
제로 남겨두었던 명제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공개된 내적 발화, 과시적(남에게 보여주려는) 내적 발화로 발전시켜
내적 발화와 내적 발화 사이의 잠재적 커뮤니케이션으로?
>근데 이러면 내적 발화, 내적 대화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될지도!
내적 발화의 개념이 함축하는 (말의) ‘내적 대화성’이 가장 명확하고 설득력 있
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은 다름 아닌 소설이다. 말들이 상호작용하고 매개되고
결합되고 혼종되는 복잡한 과정을 일컫는 ‘대화’는, 그것이 ‘자아’의 개념에 본질
적인 것만큼이나 ‘소설’에도 본질적임이 판명된다.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위 ‘다성악적 이념’이 구현된 실례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탐구’를 위
한 최고의 형식이 된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에게, 말
의 현상학이란 곧 심리의 해부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바흐친의 경우,
“소설은 자아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특별한 의미를 조직하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
와 발화 방법들 간의 고도로 복잡한 조합이자 대화”31인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
에서, 초기의 ‘내적 발화’ 개념으로부터 바흐친이 이끌어낸 새 모델을 ‘소설적 자
아Novelistic self’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일종의 원형적 사유로서 ‘내적 발
화’ 개념이 지니는 잠재성이다. 즉 소설적 자아를 향한 길이 내적발화의 유일한
가능성이었을까?
>>아.. 논문 저자가 중간중간 질문 던지는 식으로 전개하는 거 너무 멋지당ㅠㅠ
이 물음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소설적 자아를 향한 길과
구별되는 ‘또 다른’ 방향의 발전 가능성이다. 가령, 내적 발화의 잠재성이 ‘예술적
모델’이 아니라 ‘세계 모델’ 자체를 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걸 내거에 가져와서 써볼 수 없을까!!!
주지하다시피,
내적 발화의 개념에 내포된 ‘사회적인 것’의 위상이 세계 모델 자체를 지향하게
될 때, 우리는 ‘소설’적 세계 대신에 ‘카니발’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카니발의 세
계, 모든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것들이 위협받고 허물어지는 바로 그 세계에서, 이
른바 ‘비공식적 의식’으로서의 내적 발화는 자신의 잠재적 역량(바흐친의 흥미로
운 비유에 따르면, ‘정치적 지하활동’)을 온전히 실현한다. 억압된 비공식적 의식
이 개인 내부에서 퇴화되는 대신에 거대한 ‘사회적 몸’의 에너지로 전화될 때, 그
것은 현존하는 세계 자체를 뒤엎을 수도 있는 거대한 카니발의 전복적 역량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뭔가 좋은 것 같은데 이해가 안가!!!!!!
내적 발화의 개념에 내포된 '사회적인 것'이 뭐징???
한편 바흐친의 이런 행보를 놓고 볼 때, 로트만의 자기커뮤니케이션 개념은 지
극히 흥미로운 비교의 지점들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로트만이 이 개념을 ‘예술적 모델’, 특히 장르와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술해 온 [자기커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이 시적 창조물의 본
령에 놓인 과정들에 대한 설명에도 해당된다는 점은 명백하다.”35 자기커뮤니케이
션은 본질상 시적 원칙과 연관되는 바 (‘나-나’ 커뮤니케이션의 유사-리듬적 형태
로의 지향을 상기하라), 텍스트가 나-나 커뮤니케이션과 나-그(녀) 커뮤니케이션의
양 극단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우냐에 따라서 ‘시’ 혹은 ‘산문’으로 인식될 수 있
다 (즉, 나-나I에 가까우면 시로, 나-그(녀)에 가까우면 산문으로). 이렇듯, 바흐친
과 로트만의 차별적 지향은 장르의 선호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흐친에게
모든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는 것이 ‘소설’의 세계라면, 로트만에게 모든 ‘반복’을
‘창조’로 변모시키는 것은 시적 원칙인 것이다.36
36 바흐친에게 ‘시’ 장르가, ‘소설’ 장르의 ‘독백적’ 안티테제에 불과한 것인 반면, 로트만에게 시
는 기호체계의 복수언어적 구조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된다. 언어를 통해 ‘이야기’하는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조형적 기호의 이미지를 닮으려 하
는 바, 세계를 모델링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경향 사이의 이런 끝없는 상호작용과 긴장, 인류 역
사의 전 과정을 관통하고 있는 이 영원한 경향을 가장 명징한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 속에서다.
>>역시 로트만쪽이 내가 찾는 것과 비슷한 듯
그러나 로트만의 차별화된 이론적 입지를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대목은 어쩌면
따로 있다. 자기커뮤니케이션을 커뮤니케이션 주체의 ‘인성의 재구성’과 연결시켰
던 로트만이 이제 그것을 ‘문화’라는 거대 체계 자체의 구성 및 작동 원리로 격상
시키는 대목이 그것이다. “예술 텍스트의 구성 법칙은 넓게 보아 문화의 구성 법
칙 자체이다. 따라서 문화 자체는 다양한 발신자에 의해 전송된 메시지의 총합이
자 인류라는 거대한 자아Я에 의해 그 자신에게로 발신된 하나의 메시지로서 간
주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문화는 자기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예증인 것
이다.”37
>>.....로트만 간지 폭.발.... 간지라는 것이.. 폭.발.한.다..!!!!!!!!!!!!!!
1980년대 이후 로트만은 그 자신이 곧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субъект и сама-себе объект” 독특한 체계, 즉 “자기-조직화 self-orgarnizing하는
체계”의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기호계” 개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복수
의 언어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동시에 그것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점,38
다시 말해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어떻게 기호계
는 문화를 창조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공간 자체가 될 수 있는가? 어떻
게 언어가 문화로 정의되는 한편 언어에 문화가 선행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부딪히게 되는 역설은 꼭 자기-모순에 해당하지는 않는바, 그것은 자기-지시 체계
에 관한 이론들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기호계에 관한 로트
만의 묘사는 자기-지시적 체계에 대한 묘사에 다름 아니다.”39
>>앗.. ! 자기 지시적..!!1
39 Winfried Noth, Yuri Lotman on metaphors and culture as self-referential semiosphere, Semiotica
161-1/4(2006),260-261. 한편 기호계 개념의 이런 모순적 상황을 직접적인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로트만의 예외적인 논문으로 “주체이자 그 자신에게 객체인 문화”가 있다. 유리 로트만,『기
호계-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 314-331쪽 참조.
주지하다시피, 문화의 복수언어주의(полиглотизм)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 이후,
생의 말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강하게 로트만을 사로잡았던 문제는 이른바 ‘역사
기호학’의 문제였다. 그는 체계로서의 역사가 일련의 파국적catastrophic 국면을 거
치면서 “스스로를 갱신하는” 과정, 움베르토 마투라나H. Maturana의 표현을 빌자
면 “자기 생성의 과정(autopoiesis)”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 자기폐쇄적인 부르주아식 자아 모델에 만족할 수 없었던 러시아의 이론
가들이 취한 방향은 이와 달랐다. 그들의 전략은 그런 ‘공백’을 고발하는 대신에,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동적이고 혼성적인, 그리고 복수적이고 자기창조적인
의미작용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아가 자신의 바깥에 ‘정
신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결점이 아닌 가능성이며, 비극이 아
닌 카니발이다. 바흐친의 ‘결코 최종화될 수 없는 인격의 잠재성’이나 로트만의
‘예측 불가능성을 수반하는 번역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은 분명 재현의 논리나 형
식적 의미모델로부터 벗어난 어떤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라캉의 ‘실재the Real’와 같은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자아)와 체계의 관계 속에서 분열이 아닌 대화를, 공백이 아닌 혼종을 보
려는 이런 태도를 과연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것은 ‘중심적’ 사유의 전형적인 자
기비판 형식(가령, 자기부정의 의지에서 비롯된 ‘해체’의 경향)과 구별되는 이른바
‘주변적peripheral 사유’의 특징적 전략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혹시 그것은 ‘주
체(성)’의 문제에 대한 러시아적 사유의 이론적 허약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
일 뿐인가?42 이 흥미로운 이 물음은, 그러나 또 다른 글의 본격적인 주제가 돼야
만 할 것이다.
유리 로트만,『기호계-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
이거 쓴 논문 저자 글을 뭔가 잘 읽히면서도 멋지게 쓰신당.. 우왕
헐 잠깐만 설마 근데 저거 옮긴 사람 = 논문 저자? ㄷㄷ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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