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디지털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탈각한 것, 그럼으로써 과거의
아날로그 이미지와 구별된 것은 바로 이런 지표적 실재성이다. 잘 알
려진 것처럼, ‘가상성(virtuality)’이라 불리는 디지털 매체의 가능지평
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미지를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실재와
의 물리적인 접촉을 기초로 삼는 흔적 이미지의 본래적 양태, 즉 ‘지
표성(indexicality)’과 대립하게 되었다. 지표성을 상실한 디지털 이미
지는 본질상 일종의 명령어들, 즉 수학적 알고리듬의 결과이지 결코
실재가 남긴 흔적이 아니다. 결국 디지털 기억이 잃어버린 흔적이란
사진으로 대표되는 지표성의 상실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차 강조해야만 할 것은 실재, 즉 과거와의 생생하
고 직접적인 연결을 함축하는 ‘지표성’의 개념이 문화적 기억의 핵심
적인 자질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흔적 기억이 등장한 이후의 일, 말하
자면 ‘포스트-아카이브적’ 역사의식의 결과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전환은, 앞서 지적했듯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대함에 있어
서 직접적인 현전을 향한 요구, 다시말해 텍스트적인 해석의 ‘중계’를
거치지 않으려는 특정한 경향을 가속화했다.
디지털 매체 시대의 문화적 기억이 처해있는 가장 흥미로운 역설
은, 지표성을 상실한 가상적 세계인 인터넷에서 바로 이와 같은 압도
적인 현전성의 요구, 즉 역사적 사건을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인 현존
으로서 제시(/경험)하려는 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20) 우리가 인터넷의 세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엄밀하게 말
성'에 보다 가깝다. 더 이상 실재의 직접적인 흔적을 지니지 않는 디
지털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가상적) 지표성을 체험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모순된 요구의 근저에는 과거에 흔적 기억
이 촉발시킨 바 있는 특정한 경향, 즉 텍스트적 해석의 중계 과정을
생략하려는 지표성의 극단화 경향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흔히 지적되
는 인터넷 정보의 가공할 속도전의 배후에는 역사적 사건의 ‘체험’의
시간과 그것의 ‘기록’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려는 경향, 즉 사건의
발생 시간과 그에 대한 해석의 시간을 하나로 합치려는 경향이 놓여
있다. 흔히 광속(light speed)’으로 표현되는 인터넷 정보 순환의 기형
적인 속도는 어떤 점에서 그것을 추동하는 ‘실시간(realtime)’의 논리
의 결과로 볼 수 있는 바, 다름 아닌 실시간의 요구가 광속을 강제하
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속과 실시간의 논리 하에서 결정적으
로 소멸되고 있는 것은 다큐먼트(정보)를 ‘선별’하고 ‘해석’할 수 있는
해석적 거리, 즉 사건과 아카이브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적 ‘간격
(interval)’이다.21)
모든 종류의 가능한 도큐먼트들의 집산물이자 선별의 과정을 거치
지 않은 자료들의 아카이브인 인터넷은, 말하자면, 원하는 ‘모든’ 사
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제공되는 아카이브, 즉 생중계 시대의 아카이
브에 해당한다(전통적인 아카이브를 규정하는 특징은 원본과의 ‘시간
적’ 거리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선택적인’ 접근가능성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즉각적인 현전의 요구, 즉각적인 제출과 이해의 요구가 수
반하는 피치 못할 결과 중 하나는 전반적인 통속화, 즉 ‘현재 다루어
지고 있는 문제가 간단하다’는 착각이다. ‘사용자 위주(user friendly)’
의 평준화된 체계인 이 아카이브에서 세밀한 분석과 해석을 위한 ‘전
문가적’ 거리는 허용되기 어렵고, 이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을 무화함으로써 결국 역사적 가치의 위계질서를 파괴하
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해석적 분별과 선택의 과정을 허용하지 않는 이
실시간 아카이브에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 예를 들어 각종 소문과
거짓 정보의 유입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된다. 종종 이런 거짓 정보
는 실제 사건의 진행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가령, 어떤
경우에는 정보 이미지의 속도가 현실적인 사건의 전개의 속도를 추월
하여 ‘가상적인’ 것을 진짜 ‘현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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