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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자기반영성 연구 / 주소영

snachild 2013. 6. 7. 17:00

 

석사논문

 

역시 학위논문 bbbbb

 

 

 

Ⅲ. 소설의 자기반영성이란 무엇인가?
자기반영성 이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에 앞서 리얼리즘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리얼리즘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통해 그것이 현실
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환영 속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 미학적 목적과 완성을
이룬다. 자기반영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그
한계점에 염증과 환멸을 느꼈기에 반환영주의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리얼
리즘의 환영성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1. 리얼리즘의 환영성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려
낸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으로 문학 전반에 걸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히 소
설과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문학사조 안에 등장하는 하
나의 시기적 문학 이론의 개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의견을 모두 끌어
안으면서 간단하게 리얼리즘을 정리하자면 ‘모방(미메시스)’과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세계를 어떻게 모방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가 리
얼리즘 논의의 이론적 핵심인 것이다.
문학에서의 모방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발전되어 왔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모방, 즉 미메시스가 문학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대
상으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미메시스로 정의하여 예술에 있어서
모방적 표현에 높은 가치를 부여
한다. 그의 이론에서 미메시스는 단순한 자연

적 현상을 모사하는 것을 넘어서 사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본질적 현
실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
이다 . 이렇게 실재적인 것을 모방하여 현상화하는 미
메시스는 예술적 창조행위의 정당한 출발점으로 간주되어 리얼리즘의 토대가
된 것이다.18)
따라서 이것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은 문학을 기본적으로 현실의 모방과
재현
이라고 본 것이다. 현실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모방하여 재현하는가가 보
편적 리얼리즘의 기본 과제라 할 수 있겠다. 사실적인 현실의 재현은 독자들
로 하여 소설의 현실과 실재의 현실을 동일시하게 하는 환영에 빠지게 한다.

 

>>근데 진짜 사실적인 현실의 재현 = 소설의 현실과 실재의 현실을 동일시... 하게 하는 환영... 에 빠지게 만듬????

    뭔가 환영이라고 하니까 가치절하하는 느낌인데..

    그렇게 치면 뛰어난 리얼리즘 문학과

    단순히 현실감을 매우 높인 가상 현실 버추얼?? 같은 것은..... 다른 의미에서 현실의 모방?

    미메시스가 사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고유한 본질적 현실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그런 '본질적 현실성'의 문제이지

   소설의 현실이 실재의 현실과 같아~ 동일시~ 환영~~~ 은 아니지 않나

 

 

 

단지 보편적인 자연을 재현하는 것만이 많은 사람을 오랫동
안 즐겁게 할 수 있다. >> 왜? 셰익스피어는 모든 작가들, 적어도 모
든 현대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연 시인이다. 즉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삶과 그 풍속들을 충실히 거울로 비추어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특정한 장소의 관습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세계의 그 밖의 것들, 즉 단지 소수에게만 영향을 줄 수 있는
학문과 직업의 특수성이나 혹은 잠정적인 유행이나 일시적인
의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세계가 제공하
며 관찰하면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진
정한 자손들이다. 다른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은 너무
나도 개별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대개 하
나의 류이다.19)

 

 

전통적인 리얼리즘은 개별적인 모습을 통해 보편성을 그리며 현실을 모방하
여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의 사회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동일시하여

현실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 전통적 리얼리즘 작가들에게 있어서 현실의 모방
은 항상 이데올로기적인 진리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할, 환각
효과의 도구였다.20)

 

>>아 그렇구나... 이제 좀 이해 감

 

 

(중략)

 

그에 이어 우리가 지금부터 논의하고자 하는 리얼리즘21)이 본격적으로 등
장한 것은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근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이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
가 사회를 잠식하면서 물질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 낭만주의는 사회적 현실로
부터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기 일쑤여서 사회와 마주선 주체적인 근대인을 잘
그리지는 못했으나22) 리얼리즘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 속에 문제적 현
실과 그 현실이 직면하고 있는 고뇌에 싸인 개인을 그렸다. 이로써 소설 속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와 그에 대항하여 생각하는 근대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리얼리즘은 혁명적 성격을 드러내며 사회를 비판하게 된다. 전
통적 리얼리즘과 목표는 달라졌으나 기본적으로 자연(현실과 사회)을 사실적
으로 재현
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그 환영성을 만들어내는 목표가
달라졌던 것이다. 이제는 문제적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다음 사회주의, 비판적 리얼리즘 좀 나오고

 

 

 

따라서 루카치를 선두로 한 리얼리즘 옹호자들은 현실 속의 인간은 사회와
별개일 수 없으니 현실을 모방하여 재현한 문학 역시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를
그린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등장한 철저히 개인의
내면과 고독을 그린 모더니즘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루카치는 이 고독을 철저
히 개인의, 공동 사회의 한 단편으로 보면서 ‘그들의 고독 밖에서는 다른 인
간들의 일반적인 생활, 투쟁과 화합이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25)며 이 고독
을 보편적인 것이 아닌,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따라서 리
얼리즘 속의 개인(등장인물)들은 설사 거대한 사회 속의 개인의 삶이라는 단
편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 전체를 대변하기 위한 보편
성과 총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파편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ㄷㄷㄷ 모더니즘을 이렇게 까다니ㄷㄷ

  그래서 전형적인 인물? 얘기가 나왔던 건가

 

루카치는 계속해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리얼리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총체성을 등한시하고 인간 개인의 내면에만 관심을 가진 모더니즘을
루카치는 ‘추상적 가능성 혹은 주관적 가능성’만이 가득한 세계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리얼리즘 문학은 극단적 상황
에서도 인간의 구체적 가능성(현실)과 추상적 가능성(내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26)만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그러하듯이 추상적 가능성만 가득하고 그
것들을 품고 있는 구체적 가능성이 떨어져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구체

적 가능성이 드러나게 되면 추상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게 된다고 말
한다.
추상적 가능성은 전적으로 주관성의 영역에 속하며, 반면에
구체적 가능성은 개인의 주관성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변증법
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므로후자의 문학적 제시는 손으로 만
질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실제적 인간
의 묘사를 의미하게 된다. 등장인물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개인의 구체적 가능성이 ‘불운하게도 무한한’ 순
전히 추상적인 가능성들로부터 선발되어, 그 개인의 바로 그
발전 국면에서의 결정적 가능성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원리만
이 작가로 하여금 무수한 추상들로부터 구체적 가능성을 구별
해 내도록 해 줄 수 있다.27)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중요한 경향이 ‘현실의 희석’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현실을 희미하게, 추상적 가능성 즉 개인적 인간과 동일하
게 그려내면 인간의 내적인 본질도 이와 더불어 희미해지다가 분해된다는 것
이다. 인간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경험적 단편들의 결과로 격하되어 그 자신
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28) 그는 인
간과 사회가 갈등하며 대립하는 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 그 안에서 인간이 성

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허허... 모더니즘 참 싫어하시네효.. 현실의 희석이라니......;

 

실질적으로 우리가 근대적 소설이라 일컫는 작품들을 되짚어 보면 그 바탕
에는 문제적 현실과 그에 대립하여 갈등하는 개인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개인
은 처음에는 자신을 억압하고, 손에 넣을 수 없는 욕망을 갖게 하는 사회와

대립하며 좌절한다 그러나 .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면
서 비판적으로 사회를 대면하고 그 과정에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이러
한 의미에서 보면 사회라는 객관적인 배경 없이는 주관적인 인간이라는 인물
은 우선 문제제기 자체를 하지 못할 것이며, 그 해결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숙
혹은 발전에도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가치를 성숙 혹은 발전에 두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겠듯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절망적이고 손에 넣기 힘든 현실이 보이지만 그것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한 인간이 올바른 과정을 거쳐 가
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모더니즘은 눈앞의 변하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절망하여 개인은 더 이상 사회를 보지 않고, 자폐증적으로 인
간의 정신 안으로만 시선을 향한다. 따라서 겉으로라도 변화와 발전을 담지
않는 문학은 있을 수 없다고 외치는 루카치는 이러한 모더니즘 작가들의 이데
올로기 때문에 인간 활동은 선험적으로 무기력하고 의미가 박탈된 것으로 묘
사된다고 비판하면서 그 전형적인 모더니즘 예술의 작품으로 카프카의 작품들
을 언급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시간의 분절과 정신병리학의 사용 등 19세기
리얼리즘 작품들의 틀을 벗어난 모더니즘을 가차 없이 비난한다

 

>>루카치 마음에 안든다ㅋㅋㅋㅋㅋㅋ ㅗㅗ 난 리얼리즘이랑 안 맞는듯

 

 

(중략)

 

여기서 필자는 리얼리즘의 미학적 원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앞서 리얼
리즘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 중 하나로 ‘인식’을 꼽았는데, 이는 인식의 방식
이야 말로 리얼리즘을 논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예술적 인식의 방법 중 ‘형상적 인식’을 택하고 있다. 형상적 인
식이란 개별적 형상화를 통해 보편적 삶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말한
다. 예술의 개별적 형상화는 그 보편적 인식기능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
어서 결코 형상이 인식을 위한 수단에 머물지는 않는다.30) 소설 속의 개인은

단지 보편적 삶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하나의 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리얼리
즘에서는 개인과 사회를 분리하여 그 각각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를 나병철은 다음과 같
이 설명하고 있다.
예술적 형상적 인식은 개개의 인식자(작가나 감상자)와의 연
관 속에 있는 개별적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한다. 즉 인식자의
가치, 이념, 정서와 연관된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식한다.
이 점에서 형상적 인식은 보편적 법칙에 대한 논리적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 삶에 대한 ‘자기인식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
다.
자기 인식적 인식 속에는 보편적 법칙에 대한 인식이 일 계
기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인식자의 이념, 정
서 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형상적 인식
에서는, 보편적 법칙의 인식이 얼마나 올바르냐와 그것이 개별
적 인식자의 내면에 얼마나 자기인식화 되었느냐의 문제가 통
일적으로 연관되어 있다.31)

 

>>여기서 '자기'는 작가인가???

 

리얼리즘 작품 속에는 인간과 그 인간이 머무는 보편적 사회가 그려지며 그
둘 사이의 문제적 관계가 표현된다. 독자는 이러한 작품을 읽을 때 ‘자신의 가
치, 이념, 정서와 연관된 인간의 삶’, 즉 객관적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삶을 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성(객관적인 익숙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의 내면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인식적 인식인데, 이것은 객체 그리고
보편적 인식으로써의 인간의 삶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다.
이렇게 리얼리즘 속에서는 작가나 독자가 처해있는 현실과 사회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인식 대상, 즉 작품 속에서의
인간의 삶을 주관적으로 자기인식화 하여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
로 예술의 수용자는 예술 작품을 실재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리얼리즘이 주장하는 예술적 인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을 옹호
하는 루카치는 이런 현실성을 깨뜨리는 모더니즘의 미학(전경화, 탈자동화, 낯
설게 하기 등)을 격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중략)

 

 

이러한 발언은 루카치가 리얼리즘 이론을 펼칠 때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논
리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설명한 인식론 미학에 대
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루카치는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으로 리얼리즘의 미학을 설명한
다.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이란 미학적으로 개별성(현상)과 보편성(본질)을 통
일시키는 방법을
말한다.33) 작가가 작품에서 개별적인, 경험적 현상들을 그려

냄으로써 현실과의 관계라는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술은 직접체험을 가공해 본질적 연관관계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다양한 현상들로 매개해 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현상과 본질의 새로운 통일체, 즉 본질을 명백히
드러낸 새로운 삶의 직접성이 나타난다.34)
루카치는 이러한 현상과 본질의 합주로 새로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지 못
하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객관적 현상에만 치
우치고,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모더니즘은 객관성을 잃은 채 추상적인 것에
만 사로잡혀 현실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관적 본질만을 보
여주기 때문이다.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과 더불어 루카치의 인식론 미학의 주요한 개념은 ‘총
체성’이다. 총체성이란 각각의 현상들이 모여져 본질적 연관관계를 이루는 것
을 말한다. 한 사회의 총체성을 설명하려면 당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계층, 이
데올로기 등 다양한 현상들을 매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전체적
연관관계 곧 총체성은 다양한 현상들을 매개하는 본질적, 총체적 연관관계를
파악해야 얻어진다.35) 그리고 이와 더불어 현상과 본질과의 관계를 제대로 표
현할 수 있는 전형성을 그려내야 한다. 전형적인 사회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그려야만 그 묘사를 통해 현상과 본질이 통일되어 인물과 사회의 관계가 형상
화 되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야 이 사람 왜 이렇게 논문 잘 씀??? 쏙쏙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전망(perspective)’을 살펴보겠다. 원근법으로도 불리는 루카치
의 이 미학 개념은 진행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며, 이야기의 실마리들을 정리해

주고 또한 작가로 하여금 , 중요한 것과 피상적인 것, 핵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36) 루카치는 이 원근법에 대해 말하기를
객관적으로 원근법은 특정한 역사적 과정의 중요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주관
적으로는 이런 움직임들의 존재성과 행동양식을 파악하는 능력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했다.37) 원근법은 변화하는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역사를 예견하는 능력38)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
야 한다. 역사 속에서 작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어떠한 역사적 혹은 정치적
결과를 보게 될 것인 지를 예언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작품 속의 전형화
된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 속의 전형화 된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
인가를 묘사하는 것이다. 즉, 미래 그 자체가 표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역사적 사회가 운동하는 것인가가 그 대상이 된다. 이
에 대해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전망은 잘 이해 안간다...

 

(중략)

 

이처럼 전형과 원근법은 특수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위
대한 리얼리즘 작가만이 경향과 현상을 역사발전 과정에 충실
하게 파악하고 인간의 행동이 형성 평가되고, 기존의 전형들이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전형들이 등장하게 되는 분야의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39)

 

>>그래.. 그럼 그렇지... 역사를 발전의 과정으로 보니까 이런 발상이 나오지

 

(중략)

 

바로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리얼리즘과 자연주의가 확실히 구분될 수 있는 것
이다. 리얼리즘은 사회의 벽에 부딪힌 개인의 좌절을 보여주지만 이러한 원근
법을 통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그 사회가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어 개별적
전형적 인간이 그러한 운동성을 지닌 전형적 사회와 어떠한 본질적 관계를 맺
게 되는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려지는 전형들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원근법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그리고 한정적인 구체적 사
건만을 보여주면 작품 안의 전형은 시대를 초월한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반
면 자연주의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개인을 세밀하게 그리는데 그 문제를 야기
한 사회와의 갈등을 풀어나갈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연주의는
현상적인 표면만 다루고 있어 본질적 관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루카치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더니즘에서는 보편적 역사로서의 사회가 더욱더 사라
진다는 점에서 전형을 묘사한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아 시대를 초월한 지속성
을 그린 인물을 창조할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미메시스에서 시작된 리얼리즘은 루카치의 이론에 이르러
이렇게 개별적 형상들을 통해 독자 혹은 작가라는 인식자가 인간의 보편적 삶
이라는 인식대상과의 연관관계를 자기인식화 하여 받아들이게 하고,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의 관계, 즉 현상과 보편적 본질의 연관관계는 중첩되고 통일

되어 총체성을 만든다 그리고 . 리얼리즘이 주창하는 올바른 총체성과 역사성
을 지닌 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전형적 사회와 그 안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물을 그리는 원근법이라는 미학적 원리를 사용한다.
이러한 미학적 원리를 갖고 우리의 현실을 모사하여 문제적 개인과 거대한
사회, 그리고 그들의 갈등 관계를 통해 그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
는 것이 바로 리얼리즘인 것이다.

 

 

 

2. 자기반영성
미국의 소설가 로널드 수케닉(Ronald Sukenick)은 『소설의 죽음 The
death of the Novel』(1969)이라는 소설의 첫 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다.
픽션은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방법을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우리가 포스트리얼리스틱 픽션이라고 부르기 시작
한 새로운 소설들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
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리얼리스틱 픽션은 질서
정연한 시간을 구성과 내러티브의 매개체로, 개인의 심리를 등
장인물의 주체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묘
사의 대상으로 전제하고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포스트리얼리즘
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절대적 가치들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현대의 작가들은 - 자신이 그 일부가 되는 인생과 긴밀한 연
관을 갖고서 - 출발점에서부터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티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전지의 작가이지만 죽고 없다. 그러므
로 이제는 아무도 이 세상의 플롯을 알 수가 없으며, 우리의
리얼리티가 창조자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는 것의 진실성도 믿을 수가 없다. …라는
데에서부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문학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
이며, 그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문학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젠 다만 읽기
와 쓰기만이 있을 뿐이다.41)

 

리얼리즘 시대를 지나오면서 일군의 예술가들은 리얼리즘이 강조한 사회,
즉 실재의 모방과 재현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리얼리즘은 작가들로 하여금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작품
역시 그 안에 우리의 모습인 사회 속의 개인을 그려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
러나 시대가 변해가면서 많은 작가들은 과연 작품 속에서 리얼리티를 완벽하
게 재현할 수 있을 지
, 그리고 문학작품이, 특히 소설이 반드시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그려야만 하는 가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렇게 리얼리즘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인해 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인
간과 사회의 관계를 모방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대신 모더니즘
작가들은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독
자에게 환영성을 부여하기 위한 내러티브가 아닌 오히려 그 환영성을 깨뜨리
기 위한 내러티브
를 창조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자기반영성이 자신만의 타이틀을 걸고
본격적으로 이론이 정립되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
니즘 시대부터이다
.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 학자들은 모더니즘 역시 리얼리즘
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서 인
간의 내면으로 그 모방의 대상은 달라졌으나, 모방과 재현이라는 방법은 같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모더니즘의 시기부터 리얼리즘의 환영성을 깨고자 개인의 의식
을 따라 내러티브를 창조하거나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장치
를 설정하는 등 자기반영적 성격
이 확연히 작품 속에 드러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고자 모더니즘과 함께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여 조
명받기 시작한 자기반영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더불어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문예사조의 이론으로 등장하고 연구되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바로 이 자기반영성, 그 중에서도 소설의 자기반영성이 무엇인
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1. 자기반영성의 용어와 개념들
자기반영성은 말 그대로 스스로를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설에
서의 자기반영성은 소설 안에 소설의 모습이 여러 가지 기법을 통해 반영되는
이다. 로버트 스탬은 자기반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reflexio/reflectere("되돌
아보다“)에서 파생하였으며, 철학과 심리학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분야에서 ‘자기반영성’은 인식 과정의 주체
및 객체 모두로서의 정신 능력을 나타냈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문법적, 철학적으로 자기반영성을 지닌
다. 또한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경우에는, 의식의 회의적 관찰 - 즉, 의식이
스스로의 의식 작용을 지켜보는 일 - 이 인식론의 관건을 이

룬다. 존 로크 John Loke는 『오성론 on Understanding』
(1690)에서 반성(자기반영성)을 정의하기를, 정신이 스스로의
작용에 관해, 그리고 그러한 작용의 성격에 관해 가지는 지식
이라고 하였다. 자기 반영적 사고의 또 다른 원류는 문학 및
문학에 대한 성찰 속에서 발견된다. 『순진하고 감상적인 시에
관해 on Naive and Sentimental Poetry』(1795)에서 프리드
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는 순진하면서 즉흥적인 시와 ’반
어적인‘ 시를 구분하였다. 후자의 시에서는 시인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가지는 자각이 시 기법의 일부를 이룬다.42)
자기반영성은 자신을 거울에 투영하여 보되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머
릿속에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자기반영성은 문학, 예술 이외의 방면에서
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자기는 소설

   자기가 자기를 반영한다는 것이로구나!!!!

 

(중략)

 

리얼리즘 문학들은 그 주제의 대상이 문학의 외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대에서부터 언어라는 변동성을 지닌 불완전한 도구로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작가들이 그 시선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내부로 돌려 문학이라는 매체 자체가 글쓰기의 주제가 된 것
이다. 그리고 이
들은 재현의 한계와 더불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창작의 한
계에도 이르렀다. 자기반영성을 주창하는 작가들은 독창성과 창조성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며 작가를 신 같은 초월적 존재로 보지도 않으며, 또한 문학 작
품을 신이 창조한 신성한 산물로 보지도 않는다. 문학작품이란 어디까지나 작
가라는 장인이 삶의 경험이라는 원자재로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인공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43)
이와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 이론이 정립된 소설의
자기반영성은 그 용어만 해도 여러 가지로 파생된다. 용어에 대해 스탬은 다
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로버트 올터 Robert Alter의 용어인 ‘자의식적 소설
self-conscious fiction'은 인공물로서 소설의 지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소설가들에게 적용된다. 패트리샤 워
Patricia Waugh와 린다 허치온 Linda Hutcheon의 용어 ’메
타픽션
metafiction'은 스스로의 내러티브 정체나 언어적 정
체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소설에 관한 소설
’을 말하며, ‘나르
시시즘적인 내러티브’는 이러한 텍스트적 자기 인식
을 가리키
는 비유적인 형용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반환영주의
anti-liiusionism'는 플롯이나 등장인물 혹은 언어의 비현실성
을 표면에 드러냄
으로써 의도적으로
현실 모사 전통에 반대
되는 입장을 취하는 소설 혹은 영화를 가리킨다. ‘자기 지시
성 self-referentiality'은 텍스트가 스스로를 가리키거나 지
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액자 구조화
mise-en-abyme'는 거울 속의 거울 반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문학, 회화, 혹은 영화의 어떤 방식
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한 구절, 한 부분, 혹은 한 시퀀스가
전체 텍스트 방식을 축약하여 실행해 보이는 방식을 말한
다.44)

이렇게 자기반영적 소설들을 나타내는 많은 용어 중 특히 많이 사용되는 것
이 자의식적 소설과 메타픽션이다.
김욱동의 말을 빌면 자의식적 작가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어디까지나
허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거나, 허구와 그것이 재현하거나
표상하려는 실재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로버트 울터가
“쉽게 말해서 자의식적 소설이란 인공품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체계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실재처럼 보이는 인공품과 실재 사이의 의심스런 관계를 탐색하
는 소설이다.”라고 못 박는다고 말하면서 자의식적 소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
다.45) 결국 자의식적 소설은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이음새를 감추어 숨기려 했던 인공성을 고의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과의 격차를 목격하게 해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것
이다.

한편 메타픽션은 작품 안에서 소설이라는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메타픽션이라는 용어는 1971년 미국작가 윌리엄 개스
(Willam Gass)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메타픽션은 자의식적 소설과 마찬가
지로 작품이 허구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텍스트를 만들어 가는 과정
과 텍스트 자체에 관심을 갖고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적 소설이건 메타픽션이건 모두 소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
설의 관습을 깨려는 것과(자의식적 소설) 소설의 생산 과정을 고스란히 담는
것(메타픽션) 모두 인공물로서의 소설의 모습을 강조하여 리얼리티의 재현이
라는 관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둘 모두 소설이라는 스스로의
모습을 통해 글쓰기를 해 나간다.

 

>>저 윌리엄의 소설로 쓴 논문 예전에 함 본적 있는듯...

 

 

2.2. 자기반영성 이론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더불어 자기반영성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
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이 그 이전까지 소설 속에 자기반영성이 존재하지 않았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1960년대
이후부터 자기반영성 이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자기반영적 소설은 사회나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난다. 이전 리
얼리즘 소설에서는 사회나 내면적 현실이 작가라는 신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
어져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었다. 리얼리즘 작가들은 이 리얼리티를 자
신의 정체성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작가가 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선험
적으로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46)
그러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환영으로 보
고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고정하여 리얼리티를 완벽히 재현해 독자
에게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의 소설들과는 다
른 독자적 노선을 걸으며 그 시선을 소설이라는 매체 안으로 돌린 것이다. 이
에 문학이론가들은 이러한 자기반영적 소설들을 ‘반소설(anti-novel)’이라 칭
하기도 했다.
조셉 T. 쉬플리(Joseph T. Shipley)의 『세계 문학 용어 사전 Dictionary
of World Literary Terms』에서는 반소설, 즉 자기반영적 소설에 대해 “소
설적 형식의 관습에 대한 저항”47)이라 했다. 또 다른 학자 래리 맥캐프리
(Larry McCaffery)는 “메타픽션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픽션 자신을 만드는
것에 관한 직접적인 고려이다.”48)라고 하며 로버트 스콜스(Robert Scholes)

는 자신의 글에서 메타픽션 혹은 자기반영적 소설에 대해 ”픽션 그 자체에 대
한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것.”49)이라고 정의했다.

 

(중략)

 

소설이라는 문학 작품을 통해 완벽하고 정확하게 인간과 인간이 속한 사회,
즉 리얼리티를 그려낼 수 없으니 , 이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작
가들은 자기반영적 소설을 통해 작품 속에서 작위성이라는 스스로의 조건을
체계적으로 과시
해 보이며, 허구 세계라는 것은 문학적 전통 및 관습의 배경
을 바탕으로 작가에 의해 세워진 건축물임을 밝혀 준다.52)
이런 자의식적 문학으로서 소설이 허구의 산물이라는 자의식적인 모습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텍스트 생산 과정 자체에 주목하여 그려내는 것이 바로 메타
픽션이다. 작품 안에서 작품의 창작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소설은 이제 더 이
상 확고한 불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글쓰기의 과정임을 드
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창작의 행위라는 현실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글
쓰기라는 현실이 됨으로써 현실과 허구가 뒤섞여 그 경계가 해제되어 버린
다.53)
소설의 창작 과정이 주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메타픽션의 모습을 잘 보
여주는 작품이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1967)이다. 마르케스는 글쓰기
행위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작 행위를 그대로 드러내 보
이려고 한다.

 

>>>앗!!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술적 리얼리즘에서도 나왔었던!!

 

그때 아우렐리아노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과거 사건에 시간
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열한 쪽을 건너뛰었고, 자신이 살아가
고 있는 현재 순간을 해독하기 시작해, 시간 순서에 따라 앞으
로 해독해 나갔으며, 양피지의 마지막 쪽을 해독하는 행위에서
는 그 자신이 말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듯 자기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었다. 그때 예언을 미리 알고 있던
그는 자기가 죽는 날짜와 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건너

뛰었다 그럼에도 .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행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그 방에서 절대로 나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이
해했었는데, 그것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양피지의 해독
을 마친 순간 거울의 도시(또는 신기루들)는 바람에 의해 부서
질 것이고,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릴 것이고, 또 백년
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
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들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
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54)
자기반영적 작품의 작가들은 자기반영성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독자들의 환영을 파괴하는 ‘차단’이다. 통일성을
가진 전통적 리얼리즘 작품에서는 독자는 그 통일성에 흡수되어 그 안에서 이
야기 되는 리얼리티를 공감하고,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 즉, 독자는 자신
의 의식을 전혀 환기하지 못한 채 신적인 존재로서의 작가가 전달해 주는 이
야기를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반영성은 이러한 환
영을 고의적으로 깨고자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 작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
는, 통일성을 해치는 ‘차단’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생각
을 따라 리얼리티의 환영성에 빠져들던 독자들은 순간 갑작스러운 내러티브의
단절로 그 환영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 그리고는 의식을 환기하여 그 작품이
리얼리티가 아닌 인공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브레히트(Brecht)
의 소격효과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장치들을 통해 내
러티브를 단절시키고, 관중들로 하여금 ‘연극’이라는 작품을 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 이로써 관중들은 의식을 갖고 작품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브레히트에 이르러 단절은 정치화된 미학을 이룬다. 즉, 관객의 비판적
지성을 일깨우기 위해 단절이 스펙터클의 매혹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55)

 

(중략)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상호텍스트성’이다. 수세기 동안 이야기를 만들어온
인류는 이제 외친다. 더 이상의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서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지닌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헛된 신화에 불구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 된다.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 ‘상호텍스트성’이다.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는 미하일 바흐친
(Mikhail Bakhtin)의 ‘대화성(dialogic)' 개념을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번역하여 생겨난 말이다. ‘대화적’이라 함은 서로 교차하는 두 개
이상의 텍스트가 서로를 상대화시키면서 동일 문학 작품 속에서 동시에 존재
함을 말한다.
58) 이제 텍스트가 내러티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더 이상 외부
의 현실세계가 아니라 문학사 안에, 즉 텍스트 내부의 역사에 존재하는 또 다
른 텍스트가 된 것이다
. “텍스트는 인용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라는 크리스
테바의 말이 이러한 자기반영적 작품들의 상호텍스트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
다. 이와 관련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 『지식의 고고학
The Archaeology of Knowledge』(1969)에서 “한 책은 다른 책들, 다른 텍
스트들, 다른 문장들에 대한 언급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라고 지적하며 이와
더불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도 『세계, 텍스트 그리고 비평 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1983)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작
가들은 독창적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을 버리고 점점 남의 글을 다시 고쳐 쓴
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이제 독창적으로 비석에 글을 새긴다는 이미지에서
남의 글을 단순히 옮겨 적는다는 필경사의 이미지로 바뀌어간다.”고 말하고
있다.59)

 

 

(중략)

 

 

이 작품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돈키호테』역시 상호텍스트성을 지니고
있다. 『돈키호테』가 태어난 배경이 된 것이 바로 이전에 존재하던 다른 기
사 소설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작품 속에서 기사 소설들을 통해 탄생한 ‘돈 키
호테’라는 인물을 그리며. 그 안에서 다른 작품들을 재료로 삼아 이야기를 이
끌어 나간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본격적으로 『돈키호테』의 자기반영성을
논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상호텍스트적인 작품의 작가는 텍스트를 택함에 있어서 독자들에게 익숙한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상호텍스트성은 독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텍
스트에 대한 사전 지식적인 반응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 어떤 텍스
트도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독자의 경험과 동떨어져 독해될 수 없다.62) 독자
에게 익숙하지 않은 텍스트 안에서는 독자는 그 기호를 잡아낼 수 없어 작가

가 이끌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일단 '텍스트'라는 말 자체가... 이전까지 작가의 authorship을 강조했던 '작품'과는 달리 독자가 짱이라능~! 이란 느낌이 담긴 용어니까..

 

이 상호텍스트성을 제라르 쥬네트(Gerard Genette)는 자신의 저서 『양피
지 Palimpsestes』에서 더욱 세분화하여 나누고 있다. 그는 텍스트의 교류 관
계를 다섯 가지로 상정하였다. 첫째가 ‘상호텍스트성’으로 이것은 크리스테바
의 ‘상호텍스트성’보다 제한적인 것으로 두 텍스트가 인용, 표절, 언급의 형태
를 통해 공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속적 텍스트성’으로 한 문학
작품 정체 속에서 텍스트 본문과 부속텍스트 -제목, 머리말, 속표지, 표제어,
도안 및 책 장정과 작가의 친필 서명-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
타 텍스트성
’으로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것이다. 넷
째는 ‘텍스트 전형성’인데, 이것은 어떤 텍스트의 제목이나 부제에 의해 시사
또는 부인되는 장르의 분류를 말한다. 쥬네트는 제목이라는 하나의 작은 텍스
트를 통해 텍스트 전체가 그 장르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기 지칭을 부정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이자 스탬이 쥬네트의 범주 가운데 가장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이퍼텍스트성’이다. ‘하이퍼텍스트’라고 일컬을
수 있는 한 텍스트와 이것이 변형시키고 수정을 가하고 정교화하고 혹은 확장
시키는 기존의 텍스트, 즉 ‘하이포텍스트(hypotext)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다. 스탬은 이와 관련해 ’모든 문학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는 의미에서 하이퍼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63)

 

(중략)

 

 

 

 

-------

 

최초의 근대소설로서 『돈키호테』에는 리얼리즘의 이론적 속성, 즉 실재의
재현과 동시에 그 안에 내포된 재현의 불가능성으로서의 환영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대답은 바로 ‘패러디’이다. 세르반테스는 과거의 기사소설을 되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기사소설을 패러디하여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
나간 것이다.
‘패러디’는 상호텍스트성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패러디를 통해 창작된 작품
은 리얼리티가 아닌 기존의 텍스트를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패러디
는 모더니즘 시대부터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 중점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패
러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술의 한 가운데에 존재했다. 많은 예술가들은 오
래전부터 기존에 존재하는 예술 작품들을 자신들의 소재로 삼아왔다. 그것은
같은 장르일 수도 있고, 다른 장르가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작품들이 신화나
성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것도 일종의 패러디인 것이다. 스탬은 패러디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의식적 예술의 재료는 전통 그 자체이므로 - 언급하고

가지고 놀고 극복하고 추방하기도 하는 - 종종 패러디는 결
정적인 중요성을 지녀 왔다. 패러디라는 개념에는 예술 과정
에 대한 몇몇 자명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그 첫 번째가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들을 모
방한다는 진리
이다.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른 그림들을 보아 왔고, 다른 소
설들을 읽어 왔고, 다른 영화들을 관람해 왔기 때문이다. 사
람들은 자신이 읽었던 소설가들을 모방하여 - 애정 어린 모
방이건 비판적인 패러디이건 - 소설을 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세계를 향한 창문이 아니라 여러 번 지워 쓸 수
있지만 흔적은 희미하게 남은 양피지와 같은 것으로서, 다른
텍스트에 대한 언급이 행간 속을 떠돌거나 여백 주위를 서
성거리는 텍스트 교류적인 행사이다.68)

 

 

패러디의 정의와 관련해 린다 허치언(Lunda
Hutcheon)은 패러디되고 배경이 된 텍스트와 새롭게 병합된 텍스트 간의 비
평적 거리로 인해 생성된 아이러니가 그 중심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69)
패러디는 반복이지만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다. 이는 비평적

아이러니의 거리를 가진 모방이며 그 아이러니는 양쪽이 모두
차단될 수 있다. ‘초맥락성’의 아이러니와 전도는 패러디의 중
요한 형식적 작동이다. 또한 실용적 정신의 범주는 경멸에 찬
조롱으로부터 경외심에 찬 경의에 이른다.70)

 

패러디는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기에 단순한 모방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작품을 원하는 방향으로 비틀고
뒤집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허치언은 이것이 텍스트의 기호화라고 말하고
있다. 패러디, 즉 텍스트를 기호화하여 그 해독의 역할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것이다.71) 이렇게 패러디를 기호학적으로 보는 예로 지바 벤-포라(Ziva
Ben-Porar)의 패러디에 관한 정의를 들고 있다.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나 다른 예술적 대상을 가정적으로 재
현하는 것으로 보통 코믹하다. - ‘전형화 된 본질’의 재현, 다
시 말해서 패러디는 이미 최초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재현으
로 기정화 된 하나의 전형화 된 ‘본질’의 재현이다. 패러디 적
재현은 모델의 관행을 드러내고 같은 메시지 안에 두 개의 기
호를 공존시킴으로써 그 책략을 드러낸다.72)

 

 

앞서 패러디란 기존의 텍스트를 기호화하여 독자가 그것을 해독하는 것이라
고 했다 그 패러디된 기호를 . 이해하고, 해독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독자들
이 그 작품을 알아야만 한다.
그 작품 혹은 장르의 관습적인 면에 익숙해야만
사람들은 패러디된 작품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여 비로소 작가가 의도한 웃음
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독자가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작품에 익숙지
않아서 패러디를 통해 작가가 의도한 기호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더 이상 패러
디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독자에게는 그냥 또 다른 하나의 텍스트로
서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세르반테스는 기사소설이라는 최고의 인기를 오랜
기간 동안 누려왔던, 독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장르를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소설이라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는 것이 상호텍스트성과 메타픽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소설이라는 문
학 장르 자체를 소재로 삼는 상호텍스트성과 작품의 생산과정을 보여주는 메
타픽션적인 면이 모두 『돈키호테』에 나타나고 있다.

 

 

 

 뒤에는 작품론~~~

야 근데 이 논문 짱이다 이해 짱 잘 됨

인용문도 많은데 이렇게 적절 적합한 것을 다 살펴보고 가져온 것도.. 대단ㅇㅁㅇ.... 대다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