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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의 주체와 이야기 // 김선하

snachild 2014. 4. 22. 16:15

 

 

p.9

 

 이야기하는 주체이며 이야기로 구성되는 주체이다. 주체의 정립이라는 리쾨르의 기획은 데카르트와 니체의 시소게임을 통한 균형 맞추기로부터 시작한다. 말하자면 직접적 직관 대상으로서 코기토Cogito라는 주체 정립과 언어학적 관점에서 주체 해체를 대비시키면서, 양자의 어느 쪽에도 편승하지 않고 중간자적인 위치에서 해석학적 주체를 정립하고자 한다.

 

 

p.10

 

 이렇게 언어분석 방법과 해석학 이론을 접목시키는 이유는 이야기의 서술 구조가 언어라는 기호 체계에 의존해 있으면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한편, 이야기는 언어의 기술 체계를 넘어서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귀속시킬 수 있는 윤리성을 가진 포괄적 주체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의해 해명된 주체가 바로 본 논문이 해명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p.15

 

 이야기 정체성은 개인의 윤리적 결다넹 의해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형성되는 역동적 정체성이다. 말하자면 고정불변하는 실체적 정체성이 아닌 개인의 윤리적 결단에 의해 해체될 수 있고 재구성 가능한 정체성이다.

 

리쾨르에게서 이야기의 정체성 개념은 단순히 개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해당된다. 나의 고유한 삶의 역사는 타자의 삶의 역사와 밀착되어 있고 항상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p.16

 삼인칭 주체와 일인칭 주체 간의 종합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리쾨르의 작업

 

 

 p.41

 

 우리는 주체의 죽음과 거대 담론의 거부의 시대에 살고 있다.

 

 p.42

 

 정신분석학에서 의식과 자아는 존재의 근원이나 기원이 아니라 무의식과 언어를 통해 형성된 소산물일 뿐이다.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욕망의 의미론이라고 명명하면서, 그의 해석을 자신의 해석학 작업의 일부로 편입한다.

 

 

 

<<온갖 학자들의 주체에 관한 논의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에 좋은 듯

 

 

 

p.180

 

 두 번째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리쾨르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타자의 문제이다. 하이데거가 타자와의 의사소통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고, 『존재와 시간』에서는 '함께 있는 존재', 즉 '공-존제'라는 장이 있다. 그러나 리쾨르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문제의 근거를 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탐구하고자 하였으나, 레비나스에게서 주장된 바와 같이 타자와의 관계 측면에서 존재론적 문제의 근거를 찾고 있지는 않다. 하이데거

 

p.181

 

 에게 있어서, 타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은폐의 층이 두텁다. 만일 비본래성이 지배하는 존재의 영역이 있다면, 이 영역은 각각의 사람이 모든 가능한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존재'에 대한 장은 '사람들'과의 논쟁의 장이며, 은폐의 중심, 은폐가 특권을 가진 특별한 장소와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해의 존재론은 '공-존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존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이해의 존재론의 출발점은 나의 주관성과 중복되는 타자와의 공-존재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질문이 '타자'에 대한 질문을 대체한다.

 

 

p.183

 

 리쾨르의 이야기 이로느이 단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뮈토스muthos라고 부른 것, 즉 '사실들의 정돈'agencement des faits을 리쾨르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뮈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상상의 차원에서 줄거리intrigue로서, 그리고 잘 짜여진 이야기의 의미에서 플롯plot으로 규정된다. 우리는 뮈토슥 줄거리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넓게는 문학을 비롯한 모든 텍스트 구성에서부터 좁게는 삶의 이야기

 

p.184

 들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하는 시적 구성composition poetique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미메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위 모방 혹은 재현으로 표현된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미메시스는 언어를 매개로 한 행위 모방이나 재현이다.70) 그것은 단순한 복사가 아닌 창조적 모방이다. 그리고 이 모방의대상object이 되는 것은 뮈토스, 즉 '사실들의 정돈'이다.71) 달리 말하면, 모방은 하나의 활동이고 이것은 줄거리 구성에 의하여 '사슬들의 정돈'이라고 할 만한 것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구조가 아니라 구조화structurration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조화란 관객이나 독자를 통해서만 완수되는 어떤 지향된 행위이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이라는 용어는 『시학』의 모든 개념들에 역동성을 불어넣으면서 그 개념들을 작용 개념이 되게 한다. 따라서 미메시스는 재현하는 행위이며, 체계 자체가 아니라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뮈토스는 줄거리라는 정적 개념이 아닌 줄거리 구성이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것은 바로 줄거리를 창조적으로 모방하는 행위 모방과 같은 의미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 줄거리는 행위 모방이다. 리쾨르는 이 창조적 모방의 과정을 세 단계의 미메시스로 설명한다.

 

 

p.186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는 텍스트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언어적 구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언어적 구성은 뮈토스라고 했으며, 이것은 우화, 줄거리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뮈토스를 정적인 의미의 구조structure 이상의 것이라고

 

p.187

 이해한다. 뮈토스는 .. 어미 -sis가 의미하는 작용을 의미하며, 줄거리가 아니라 줄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구조화를 의미한다.

 

각주 70, 71은 시간과 이야기 58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