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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주체의 정치학 : 제국과 다중의 틈새 / 김정하

snachild 2013. 10. 23. 19:24

 

하위주체의 정치학 : 제국과 다중의 틈새 = (The) politics of multitude and subaltern in the age of empire
김정하, 연세대학교 대학원,[2006] [국내석사]

 

 

 

<<우왕ㅋㅋ 국문 요약을 '우리말 줄임글' 이라고 한다 싱기...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제국』의 마지막 장에는 제국에 대항하는
다중이 등장한다.다중은 “저항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경제적․문화적 전지구
화”에 대항하는 가난한 자들,억압받는 자들이다.제국이라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실재적으로 가장 억압받는 자들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은
자신과 미묘하게 겹쳐지는 또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자신의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을 변화된 자본주의 질서와 끊임없이 대화시키고 있는 가야트리 스피박
의 ‘하위주체’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다중이 저항적 ‘현재’를,하위주체가 사라지는 ‘현재’를 보여준다고 할 때,다중
의 ‘현재’를 가능하게 하며 하위주체의 ‘현재’를 사라지지 않도록 돕는 것은 ‘소통’
이다.다중에게 ‘소통’은 다중이 가진 ‘말할 수 있는 힘’과 관련하여 이해되기 때문
에,다중의 저항적 ‘현재’를 생산해내기 위한 전제로 이해된다.이에 반해 하위주
체에게 ‘소통’은 담론적 매개와 권력관계에 의해 굴절될 위험을 가진 것으로 간주
된다.때문에 소통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다중의 기획이며,소통의 (불)가
능성에 따라붙는 괄호 안의 부정성을 괄호 밖의 가능성으로 이행시키기 위한 여
정이 하위주체의 정치적 기획을 이룬다.

 

>>헐... 이러면 나는 하위주체가 아니라 다중을 봐야하는 거 아닌가

 

 

있다.이들은 이 새로운 잠재력의 형상을 『제국』의 마지막 장
에서 다중(multitude)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다.다중은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대의 다양한 프롤레타리아를 칭한다는 점에서 실재적 범주이면서,동시에 이 다
양성들의 공통적 조직화를 기획하기 위해 제안된다는 의미에서 기획의 범주이기
도 하다.

 

>>학술 용어는 아니라는 거?

 

 

 

실재적 범주로서 다중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시장의 세계화가 전 지구적
규모로 양산하는 잉여인간들이다.실업자들,원주민들,여성들,기타 소수자들,그
리고 정리해고를 통해 점차 많은 노동자들이 잉여인간군에 포함된다.가장 광범위
한 의미에서,다중은 ‘제국’의 프롤레타리아들,빈자들이다.다중이 다른 억압‘군’
―예컨대,성,인종―을 모두 포함하는 억압 일반의 이름이라고 말할 때에도,그것
은 ‘제국’이라는 자본주의 주권형태와의 관계성을 가장 중심에 놓는 계급 개념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아 여기서는 다중과 하위주체를 비교하는 논문이여?

 


 

부르주아적인 국민으로 거듭나게 했다.그런 의미에서,17세기 민중 개념은 국가
의 실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국가의 반향이자 반영인 부르주아 국민에 다
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혁명을 이끌던 민중이 국가 주권이라는 일자
로 수렴되어 가던 이 시기에,민중의 승리와 대당을 이룬 이름이 바로 다중이었
다. 다중은 혁명의 열기를 공유하지 못했던 이들,버려진 가난한 자들,패배한 이

들을 위한 이름이었다. 민중이 중앙 집권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하나의 단일한 의
지를 부여받은 집단이었다면,다중은 국가의 의지와 모순되는 다수에게 붙여지는
이름,조직되지 않은 혼란스런 다수라는 점에서 대중mass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여겨지던 집단이었다.

 

 

다중이라는 용어의 패배를 격렬하게 말한 이는 홉스(ThomasHobbes)였다.그
는 국가에 의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독점을 방해하는 위험이자,통일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다중을 이해했다.다중은 마치 ‘억압되었던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
기 위해 되돌아오는 것처럼,국가의 주권이 위기에 내몰린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
이다.다중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고장나게 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인식되었던 셈이다.그러나 홉스에 맞서,이러한 위험요소로서의 다중을 시민 자
유의 주춧돌로 여긴 이는 스피노자(BaruchdeSpinoza)였다.
스피노자에게 다중(multitudo)은 국가나 주권이라는 일자에 수렴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존속되는 복수성(plurality)을 가리킨다.민중이 국가로,주권으로 수렴
되는 구심적 운동을 담지하고 있다면,다중은 일자에서 다수로 나아가는 원심적
운동의 결과이다.특히 민중이 주권이라는 일자에 수렴되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서,주권의 형태나 국가의 이념적 성격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동질성과 단일성을
그 특질로 갖는다는 점은 분명하다.그런 의미에서 “국민 개념,민중 개념...은 결
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Empire103)이에 반해,다중은 스피노자에게 주
권이라는 일자로 수렴되지 않는 "복수성,특이성들의 이름"이면서도,그 특이성들
이 소멸되지 않은 채 존속되는 다원성
을 가리킨다.그러나 스피노자의 다중은 정
치적 저항의 물질적 조건이 철학적,이론적 논리를 구현하는 역사적 시기를 살지
는 못했다.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 이르러 다중의 이러한 원심적 저항이 가능
해지리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와 다중은 학술적인 개념인듯

  이야 좋은데? 복수성, 특이성, 다원성!!!!

 

 

하위주체는 본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사용한 용어로서 일반
적 의미에서 하층민 혹은 하위 계급을 의미한다.

 

>>얘랑 앞에 나온 학자로 하위주체를 보면 안될 듯. 뭔가 다양.. 다원.. 그런데 중추는 아니었던 그런.....?!?

 

 

하위주체 연구회 학자들은 이들 식민주의적․엘리트적 역사
재현을 비판하면서 하위주체의 정치적 목소리와 의지․행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
했다.

 

>>이거죠!!! 하위주체의 목소리와 의지, 행위 회복. 복원.

   이런 건 특히 최근의 그런 게 아닐까?

 

 

그람시의 ‘하위주체’개념은 스피박에 이르러,인종,성,계
급이라는 억압범주를 아우르는 내포와 외연을 가지게 된다.스피박은 최근에 발표
한 “새로운 하위주체:침묵의 인터뷰(TheNew Subaltern:A SilentInterview
)"(2000)에서 이러한 자신의 하위주체 개념을 ‘새로운 하위주체’라는 이름으로 다
시 명명하는데,이 때 ‘새로운’은 ‘변화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재정의 될 것’이
라는 함의를 갖는다.그러므로 심화되는 양극화와 절대적 빈곤층의 팽창이라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하위주체 개념을 다시 사유하려는 스피박의 고민
이 담긴 ‘새로운 하위주체’는 이제,‘제국’의 질서로부터 다양한 억압 범주들의 ‘해
방’을 기획하는 다중과 상당히 근접한 형상을 띠게 된다.

 

 

첫째,다중과 하위주체는 심화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제시되는 범주들로서,단순한 정치적 픽션으로 제시되는 주체성들과
는 다르다.물론 다중은 경험적으로 분류되어 이해되는 계급이기보다,‘힘’으로 이
해되는 잠재적 영역으로 자주 이해되지만,여전히 자본과의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계급’의 이름으로 전유되어 명명된다.다중의 경우,변화된 노동자 개념―삶-시간
전반을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에서 출발하는데,자본주의라는 ‘공통의 착취’
를 공유하며,이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을 고민하는 가난한 자들로 이해된다.하위
주체의 경우 엘리트 식민 담론으로부터 배제된 식민지 민중들을 역사로 다시 불
러들이려는 시도로부터 시작했지만,자본의 전 세계화라는 변화된 조건 속에서 빈
자들의 억압상황을 다시 정의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한다.이렇게 변화된 자본주의
라는 현실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대안적 주체성의 물질적 조건을 문제적으로 고려
하는 대안적 주체성 범주로는 다중과 하위주체가 특기할 만하다.3)

 

>>헐.... 이런 의미야? 내가 하려고 했던 찾으려고 했던 게 이런 것인가 ㄷㄷㄷㄷㄷㄷ

 

 

다중과 하위주체는 계급 범주의 ‘단일성’(남성공장노동자라는 전통적 의
미의 프롤레타리아)과 복수적 ‘차이’(문화적 다원주의)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
는 대안적 주체들이다.다중은 ‘단일성’과 ‘차이’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명령
을 거부하며,이러한 명령이 계급을 경험적 개념인 것처럼 다룬다는 점을 비판하

 

>>아 진짜? 쩐다ㄷㄷ 더 멋짐

 

 

다만 차이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단절,그리고 해방
의 열망이 다중에게서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affirmative)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는가,하위주체에게서처럼 부정적인(negative)방식 즉 일종의 인식론적 한계 지
점으로서의 부정항으로 제시되는가에 놓여 있다.

 

>>허억;; 하위 주체가 이런 거였었다니

 

 

대안적 주체성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의식을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인 벨 훅스
(BellHooks)는 ‘열망(yearning)’(27)이라고 불렀다.‘열망’은 인종,계급,젠더와 같

은 억압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차이가 더 이상 억압이 되지 않는 세계를 기획
하는 공통의 정치적 감수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다중과 하위주체 역시,대안적
주체성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각각의 정치적 기획이 이 형상화와 연루된다는
점에서,이 이름을 붙이는 이들의 ‘열망’이 투사되는 주체성들이다.다중과 하위주
체를 비교하는 일은 다중이 말하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열망이 어떠한 방식
으로 하위주체의 열망과 소통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과 통한다.

 

>>뭐야 이거 쩌는데?? 다른 데 써먹어도 되겠는데 이 대안적 주체성은????????

 

 

스피박이 하위주체를 강력한 정치적 주체성으로 제안하지 못한다는 지적
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의 대답이 가능하다.즉,스피박 역시 제국주의적 ‘잔재’와
변화된 제국의 상황이 낳는 이중,삼중의 억압이 제3세계에 가해지는 현실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네그리․하트와는 제국에 대한 입장을 달리한다.

 

>>끙.. 역시 하위주체는 좀 부정적/비판적 맥락인 것인가?

 

 

 

그러나 ‘형식적 포섭’은 어느 순간 ‘약발’이 들지 않는 지점에 멈춰 선다.

 

>>으잌 논문에 이런 표현을;;;;

 

 

 

만약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다면,
다행스럽게도,하위주체는 더 이상 하위주체가 아닌 것이다.
(Spivak,ThePostcolonialCritic158)

 

>>으엉 진짜???

 

 

 

 

그러나 이른바 한계 지점으로서의 하위주체를 하위주체 재현의 문제,소통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고민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는다면,이는 하위주체를 신비화하
면서 결국 타자화시키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그런
의미에서 하위주체는 다중적 ‘현재’,‘소통’,‘정치와 윤리’의 가능성 자체를 묻는
계기이자 ‘우리’모두의 ‘현재’,‘소통’,‘정치와 윤리’의 가능성 자체를 드러내는 계

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이 계기는 ‘사유’의 한계나 아포리아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하위주체들의 소통과 협력 그 자체를 ‘물으며 또한 다시 시작하는’계기,
하위주체가 진정한 하위‘주체’로 향하기 위한 필연적 거점이다.

 

 

 

 

<<'다중'이란 개념을 알게 된 논문

    중간엔 대충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