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이거 안 읽은 논문이었다니?!!?! 근데 이 분 다른 논문 읽은 듯 이게 그 사람인진 몰겠지만 새한철학회니까?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뿌리하고 있는 이성주의 거대서사는 이제 서양의 권력 담론으로
서 우리의 생활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 억압하고 있다.
주제분야 : 문화철학, 미디어철학, 영상윤리
주 제 어 : 거대 서사, 작은 이야기, 아시아, 독립영화, 단편영화. 디지털 테크놀로지
나는 먼저 시대정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약도해 보겠다. 그것은 이성주
의의 권력적 구성물들을 해체시키는 것이고, 섬세한 결과 켜와 주름을 갖는 대지
의 삶을 경멸하는 큰 이야기들을 불신하는 것이고, 조화와 연대를 위한 차이를
묵살하는 힘들에 대한 강력한 항의이며, 제도화된 보수 권력으로서의 프로페셔
널리즘을 거부하는 것이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창의적 자유를 위한 일탈
과 부정의 정신으로 충일된 삶의 태도이다.
나는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격하는 전통 담론인 큰이야기의 전형을 플라
톤주의에서 확인하고 이것이 역사적 전개형태에서 할리우드의 거대서사와 연계
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보려 한다. 플라톤주의의 초월담론과 할리우드의 거대서
사는 이제 포스트모던적 가치 다원주의 사회에서 삶의 역동성을 제약하는 권력
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이 부당한 권력형식들이 어떤 형태로든 견
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끌어내겠다.
>>당위성은 끌어내야 하는 종류의 것인가?!??
동일자의 큰 이야기의 그늘에 가려졌던 억압 받는 타자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새롭게 주목해보겠다.
>>오.. 멋져!!
1. 포스트모더니즘
1) 해체
왜 해체하려는가? 답은 명쾌하다. 아름다운 이름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불
순하게 권력화되어서 마침내 우리의 몸과 삶과 대지를 억압하려 하는 까닭이다.
하이데거나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주체성이야말로 그런 불순한 권력의
전형 중 하나이다. 주체성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세계는 하나의 기표로 전락되
는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가령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
르트적 자아의 등장으로 야기되는 상황이 그러하다. 자아가 사유 주체로 등극하
는 곳에서 '세계는 표상으로, 진리는 그 표상의 확실성으로'1) 굴러떨어지고만다.
주체성의 역사는 결국 이성이 이런 방식으로 권력화되는 역사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제 그것을 깨트리려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물어보자. 무엇을 위한 해체인가?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엇을 위한?’ 식의 물음을 거북해 한다. 이것은 단지 논리중심적 사유의 관성적
물음에 지나지 않는다. 명백한 것은 지금 권력화된 중심 코드들이 일사불란하게
삶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들은 이제 해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분은 말을 쉽게 해주셔서 좋당.. (난 이런 질답식 좋은데.. 쓰지 말라는 말을;;)
2) 거대서사의 불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포스
트모더니즘은 심지어 이론적 탐구에서 명제적, 논증적 지식까지 모든 형태의 담
론을 ‘이야기’ 틀로 묶어내려 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
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기서 더 중요해지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의 관계다.
물론 플라톤, 기독교, 형이상학, 인식론, 과학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들일 뿐이
다. 그런데 말하는 자는 누구이며 듣는 자는 누구인가. 각각은 어떤 처지 어떤
입장에 있는가. 이런 맥락들은 지금껏 간과되어왔던 것들이다. 특히 듣는 자의
입장은 일쑤 묵살되어왔다.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 계몽되어야할 수혜자의 위치
에 머물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 설교하는 자, 외치는 자 자신이야말
로 진짜 수혜자가 아닌가. 듣는 자가 없다면 사실상 말하는 자의 존재이유도 곧
사라지고 말테니까. 이렇게 보면 그럴듯한 진리에도 말하는 자가 딴뜻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야 이 부분 인용해도 될듯.. 필인용. 논문 제목도 좋은데 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를 의심할 수 있다면 그 말의 내용도 당연히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영원불변의 진리, 영혼의 구원, 만물의 아르케, 세계의 본질, 우주의
근원, 인간의 본성 등 이런 거대하고 숭고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자는 누구이고,
듣는 자는 누구인가. 이렇게 물음을 던져놓고 보면, 다른 숨겨졌던 맥락들이 드
러난다. 가령 말하는 자와 말하는 내용 사이에는 틈이 있고 이 틈은 비어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어떤 이데올로기로 채워진다는 사실 같은 것이다.
3) 차이에 대한 세련된 감각
만일 있었다면 천지창조는 우열의 분류표가 아니라 차이의 분할선을 따라 이
뤄졌을 것이다. 태초에 오직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변별되
고 분류되어 서열화될 운명에 처해진다. 말하자면 권력 질서로 재편되고마는 것
이다. 이 재편된 체계 안에서 다름이란 곧 틀림이고, 차이란 곧 열등일 뿐이다.
>>와 진짜 개멋지다..ㅠㅠ "태초에 오직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ㅠㅠㅠㅠㅠㅠ 그러나 이것이 서열화되었을 뿐.. 권력 질서로 재편되었을 뿐..
그러나 당초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이나, 부자와 빈자는 서로 다를 뿐이었다.
진위, 우열, 귀천은 역사 안에서 만들어진 이항분류다. 이것들은 그저 파랑이 빨
강과 다르고, 동쪽이 서쪽과 다르듯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차이를 지닐 뿐인 것
들이다.
차이 안에 침윤해 들어선 이 권력 이데올로기의 얼룩들을 지워내려면 차이 자
체에 대한 세련된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차이나는 것들은 수평 관계로 늘어서지
도 않고 수직 관계로 배열되지도 않는다. 그냥 제멋대로 흩어진 채로 횡단선을
가로지르며 만나고 헤어지는 이것들은 자유롭게 다채로운 관계들을 맺으며 혹은
조화를 혹은 부조화를 이룬다. 차이에 대한 감각을 되찾으려면 먼저 다양한 분류
표로부터 풀려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개인은 환원불가능한 차이의 존재들이
며, 이때 차이는 억압의 모티브가 아니라 조화의 모티브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 넘 멋져요 이왕주 선생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 거대서사와 작은 이야기
1) 플라톤주의와 거대서사
둘째, 플라톤의 거대서사는 큰 틀 안에서 시스템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다. 두 개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데아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세
계의 시스템이다. 전자는 순전한 이성과 논리의 코드에 따라 작동하고 후자는 이
성과 비이성, 논리와 비논리가 뒤죽박죽 혼재되어 작동한다.
셋째, 이 큰 이야기는 이데아의 초월적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지상과 대지와
몸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 세계는 원본이고 지상세계는
복사본이다. ‘우주는 이성의 주체가 어떤 것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그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지혜(phronesis)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이데아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방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3)
결국 우리가 발을 디디고서있는 이 대지가 아니라 원본의 세계 즉 이데아 계
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동안 이 대지를 채우고있는
복사본, 모방, 모조품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들은 조물주가 이성의 법칙에 따
라 만들어낸 것인만큼 그 본성들을 파악하는 데에서도 당연히 합리성의 시스템
에 복종해야 한다.
2) 할리우드의 거대서사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의 거대서사는 마침내 영상을 이데아로 권력화 시키고
이 유토피아와 지상의 불완전한 세계 사이의 괴리를 조장해냄으로써 삶에서의
구원은 영화관에 있다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공급해왔다.
요컨대 할리우드의 거대 서사들은 플라톤의 거대서사의 특징과 특권들을 고
스란히 승계하고 있다. 문제는 이 권력화된 할리우드 이야기들도 플라톤의 거대
서사처럼 장구한 세월 지배와 독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판에
서는 이 억압의 역사를 종결시킬 니체가 없는가.
3) 작은 이야기들
역사 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1976년에 발간한 회심의 역작 ‘치즈와 구더기’
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변방, 프리올리 지역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행적을 좇
아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이 어떻게 한 시대의 진실한 풍경화를 보여줄 수 있는
지에 도전함으로써 미시사(micro storie)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6)
>>아 멋있어..
우리는 삶에서 외형적인 규모로만 이야기꺼리를 건져올리는 전통 담론의 투
망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비껴가서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작은 이야기들, 기록의 행간과 여백에 밀려나서 소슬하게 스쳐가버
린 삶의 작은 편린들이 더 간절한 메시지를 던져줄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제는 작은 이야기다. 타자들의 삶을 담아내는 작은 서사들, 큰 이야
기의 그물에는 언제나 누락될 수밖에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우리 삶
의 켜와 결, 단층과 주름을 정직하게 더듬어내는 디테일들, 쉽게 묵살되고 경멸
되면서도 정작 우리가 눈뜨고 눈감는 나날의 일상을 가감없이 담아내는 저 다채
롭고 풍요한 대화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니체로서 작은
이야기꾼들을 기다린다.
>>아 개멋져..ㅠㅠㅠㅠㅠㅠㅠ
아씨 짱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bbbbbbbb
3. 오리엔탈리즘과 타자들
1) 아시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에서 동일자 유럽인들의 머리 안에서 타자
화된 이미지로서의 동양은 새로운 식민화의 표적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와우 이미지로서의 동양 오우...
2) 독립영화
독립 영화의 본질적 특징은 소수성(minority)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에서 소수 집단의 세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10)
4. 디지털 시대의 비젼
1) 디지털
대상의 재현 강박에서 풀려남으로써 원본 개념을 무력화시키게 된다면 디지
털 혁명은 플라톤주의에 대한 가장 과격한 전복으로 기억될 것이다. 세계를 이데
아에 대한 모방으로 간주했던 플라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원본 이데아와의
핍진성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가치를 서열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원
본과 복제본의 차이만 무화시키는 게 아니라 원본자체를 무화시키는 데까지 나
아간다.
>>와우
창작 방식의 변화로서 예상되는 것은 열린 서사, 쌍방향 창작, 공동 저자, 맞춤
형 전개, 주문형 결말 등이다. 롤랑 바르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 상황은 곧
‘저자의 죽음’이다.
3) 함정들
둘째, 국적 불명의 치기어린 실험 정신을 예술로 호도해서는 안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논객 리오타르는 전복적 아방가르드가 단순한 부정과 해체
의 쾌감으로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태도와 아무 상관없는 것임을 강변한다. 도전
의 정열로 충일된 아방가르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고뇌와 절망의
흔적들로 점철된다는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숭고의 미학에 속하는’16) 것은 이
때문이다. 기존의 형식들을 전복시키려면 작가자신이 전복되는 형식들보다 더
준열할 수 있어야 한다.
>>우왕..
셋째, 오만하고 무성의한 탈형식주의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오직 창작의 영
감과 시적 직관에 기대어 카메라를 휘둘러대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유혹일 수
있다. 종종 대가들은 콘티나 시나리오 바깥에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 바깥은
대개의 경우 바깥으로 보이는 더 넓은 안쪽일 뿐이다.
최근에 나는 전주 국제 영화제, 부산 아시아 단편 영화제 등 몇몇 독립, 단편
영화제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신인작품들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17) 거기서
만난 몇몇 작품의 그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창의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쉬웠던 것은 첫발을 내딛는 아마추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저 특유의 풋내나는
거치른 결들을 애써 덮으며 서둘러 미끈해지려는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다. 거치른 정열로 서성거리는 방황의 역사를 더 길게 가져가라고 충고하고 싶
다. 조급하게 프로가 되려는 것도 우리가 경계해야할 또 하나의 함정이다. 에드
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로페셔널한 행위란
혼란을 피하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패러다임이나 한계 안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
으며, 당신 자신을 상품가치가 있도록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내
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비논쟁적이고, 비정치적이며,
그래서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18) 사이드에 제시하는 대안은 일상의
낡은 껍질들을 겁없이 털어냄으로써 삶을 활기차게 만드는 ‘아마추어 정신’이다.
‘아마추어 정신은 해야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그것으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는가, 그것이 어떻게 개인적 과제이자
근원적 생각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19)
같은 맥락을 환기시키는 화이트헤드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겠다. ‘생명은
단순한 순응의 굴레에 얽매여 있을 때 퇴락한다. 모호하고 무질서한 경험의 용소
들을 구체화시키는 능력은 새로움으로의 전진에 본질적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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