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왜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 / 박홍규

snachild 2013. 7. 21. 22:24

 

정세근의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

 

 

윤회는 힌두교의 것이고, 불교는 그
것을 비판하고 극복한 것이므로 윤회가 아닌 반윤회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는 것이다.
이는 종래 불교를 무엇보다도 윤회의 종교로 이해했던 통념을
한순간에 날려 버린 통쾌한 주장이다. 물론 저자는 지극히 해박한 동서양
사상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이를 엄정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이지 함부로 단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저자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는 입장이 아니다. 저자는 힌
두교보다 불교에 관심이 있고, 계급을 인정하는 힌두교를 비판하며 계급을
부인하는 불교를 긍정한다. 이를 인도 현대사상에서 보면 간디(Gandhi)와 암
베드카르(Ambedkar)의 차이가 된다. 필자도 저자의 힌두교 비판에는 전적으
로 동의하지만 이를 저자와 같이 간디에 대한 전적인 비판으로까지 동의하
지는 않는다.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암베드카르의 카스트 비판에 충분
히 동의하면서도 간디의 서양 비판과 아나키즘적 사상에도 공감하기 때문

이다. 필자는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운 암베드카르에게도 그런 아나키즘이 있
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서양 비판과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가장 중요
한 대안이 간디의 그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불교
의 경우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옮긴 한문을 다시
한국어로 복잡하게 읽어야 했기 때문에 사상의 혼란은 더욱 심했고 그런 경
향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부처 자신 45년간 설법을 한 경전이 어느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
다. 이는 다른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
다. 가령 논어 가 그 어디까지 공자 말인지, 신약성경 의 어디까지가 예
수 말인지 알 수 없고, 특히 신약성경 의 경우 그 3분의 1은 바울의 편지이
지만 그래도 그 경전들이 불교만큼 복잡하지는 않다.
불교의 경우 다른 종교와 달리 그 각 종파가 만든 경전(所依經典)이 수없
이 많아 더욱 복잡다단하다. 가령 우리 조계종의 그것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라고 하는데 그것들만으로 조계종은 물론 불교를 충분
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특유의
현상이다. 따라서 불교의 교파는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가령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베트남
출신 틱낫한이나 위파사나는 소위 화두, 즉 말을 놓고 수행하는 조계종과
달리 각각 걷기나 호흡을 중심으로 하는 호흡선을 중심으로 하는 점에서 특
이한데, 이를 불교사의 이해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교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교가 인도에서 나왔다
고 하는 이유로 그것을 힌두교 내지 인도철학의 하나라고 하여 인도사상까
지 공부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도에서 석가를 힌두교에 3억이나 있다

는 신들의 하나로 오랫동안 보아 온 것과 마찬가지 전통에서 비롯되었는지
도 모른다. 인도에서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부처만이 아니라
예수도 힌두의 수많은 신의 하나로 본다. 아마도 마호메트(Muhammad)나 노장
老長이나 공맹孔孟은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심지어 마돈나도 그 신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돈나는 좀 뜬금포..

 

 

 

리그베다 에서 비롯된 카스트
제도 하 부처는 어쩌면 크샤트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상위인 브라
만과 대립했으므로 카스트를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인도의 독립을 위
해 힌두교를 그 중심으로 삼은 간디는 낮은 카스트인 바이샤 출신임에도 힌
두교의 카스트를 타고난 역할(생업)로 긍정하고 이를 인도 독립의 사상으로
삼았다. 반면 간디와 함께 현대 인도의 아버지인 암베드카르는 불가촉민 출
신의 불교도로서 카스트를 부정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불교가 카스트를 부
정한 것에서 비롯된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헐... 간디 뭐임;;;;;;;;;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를 저자의 논지에 따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인
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업業(카르마)을 말하는데, 그것이 내 행위의 결과가 아
닌 경우를 설명하는 경우 윤회輪廻(또는 轉生, 840만 번이나 윤회한다고 본다)라
는 것이 된다. 가령 지금 내가 노예이거나 낮은 계층인 것은 전생前生에 나
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는 기독교의 원죄原罪와 같은 것이라고
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기독교의 원죄랑은 그 본질이 다른 것 같은데...

 

 

철저한 윤회설을 기초로 하여 신분의 공고화를 넘어 옹호하고 확산하는
힌두교에서는 계급의 상승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상층 카스
트인 브라만을 위한 종교인 힌두교에서는 신분에 따른 계급의 고착화가 결
과한다. 따라서 힌두교에서 해방은 불살생하고 채식하며 신을 찬양하는 브
라만에게만 가능하고 나머지 카스트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즉 힌
두교는 만유萬有(만물)에 해를 끼치지 않는 절대자에 의존했다. 반면 불교와
함께 힌두교를 비판한 자이나교는 불살생을 통한 해방을 추구했으나 불교
는 그것만이 해결책이라고는 보지는 않고 힌두교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비
판을 했다.

 

>>헐-_- 나머지 카스트에는 아예 불가능하다니 이 무슨 개가튼 논리가...

 

 

 

그러나 이처럼 현재를 과거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라고 보거나 내세來世의
기초라고 보아 현재의 계급을 인정하는 것은 힌두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전
생과 내세라는 관념은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
적이지는 않아도 윤리성이 상당히 배제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불교에서도 힌두교에서와 같은 업은 인정한다. 아니 업이란 불교에서도
핵심이다. 그러나 불교의 업이란 말은 힌두교의 그것처럼 숙명적인 것이 아
니다. 원래 그 말은 행위 일반을 뜻한다. 단, 단순히 행위 자체만을 뜻하지는
않고 그 결과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칙을 뜻한다. 또
하나, 불교의 업이란 그 행위를 한 본인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타인을 고려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기책임이 강조된 점에서 지
극히 윤리적인 개념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동시에 윤리
적이다.
불교에서도 힌두교에서처럼 가령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의 업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지 업
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령 내가 창녀의 딸로 태어나 창녀를 하는
것은 업으로 주어진 것이지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
는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직업 세계인 무기업無記業도 인정해 계급으로

인해 발생하는 업을 부정한다. 따라서 백정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힌
두교의 업은 주로 악업惡業을 말하는 것인 반면 불교의 업은 선업善業과 악
업으로 구성되고 이를 인과응보로 설명한다. 이런 업은 실체가 없고 따라서
고정된 자아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우와 재밌다.. 감동ㅠㅠ

 

 

 

그런 점에서 불교는 무아설無我說에 입각한다. 이는 힌두교 윤회설의 근
거를 부정하기 위해 제시됐다. 즉 힌두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
하고 현생의 내가 내생의 나를 규정한다고 하여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
(有我)을 주장
하므로, 불교에서처럼 나라는 것을 부정하면 윤회의 근본이 무
너진다. 이것이 윤회의 근본인 자아를 부정한 무아의 깨달음, 즉 부처의 깨
달음이었다.

 

여기서 인연因緣의 ‘인’은 사회적인
상황이고 ‘연’은 개인적인 선택이므로 연기설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맺음
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살아진다는 ‘만남’을 뜻하는 것이다.

 

 

즉 무자성이란 모든 존재가 그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것으로 개인을
말하는 무아와 달리 존재와 그 존재가 이루어 내는 역사를 말한다. 따라서
무아는 무자성의 일부이다. 이처럼 연기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되어 나온 것, 즉 실체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공空(中論, 中觀)과 모든 것이 의
식이라는 유식唯識이다.

 

 

 

이처럼 불교는 힌두교의 업설이나 윤회설과 구별된 것이기에 사회적 질
곡과 계급을 타파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의 고유정신은 무아와 연기이지,
윤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는 그 고유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불타를 신격
화하는 등 힌두교화되어 인도에서 멸망했다.

 

>>오.. 그렇구나.. 쩐다!!! 왜 반윤회인지 이해 간다ㅇㅅㅇ

 

 

 

선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부
처의 말씀에 대한 모든 교파나 계율을 떠나, 부처의 마음을 갖는 사람의 마
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하며 모든 도그마를 부정한다. “부처를 만
나면 부처를 죽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하고 태어났다는 부처를
본다면 갈기갈기 찢어 개에게 주겠다”는 선사들의 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자아에 대한 확신과 ‘갑자기 깨달음’(頓悟漸修)으로 나아간다. 선
종은 불교의 자력신앙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으나, 불교가 힌두교화됨에 따
라 타력종교(대승불교, 정토종, 밀교 등 부처의 신격화에 의한)로 변했다. 그래서
불교를 함부로 윤회의 종교라 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필자는 저자가 강
조하듯이 불교에서 윤회란 무의미하다는 것 말고도 불교의 연기라는 개념
이 사물의 본질이나 실체가 아닌 사물 사이의 관계를 핵심으로 삼는다는 점
이 학문이나 예술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본질이나 실체란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의 고유하고 고정된
속성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본질이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인
과관계 내지 상호관계의 존재만을 인정할 뿐이다.

 

 

 

또 저자가 명쾌하게 밝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사물의 근원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진다고 보는 것이고, 또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無常이란
이 사물이 저 사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실체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에 더욱 깊은 관심
을 기울인다. 그것이 소위 오온五蘊, 즉 물질세계인 색色(몸)과 인식작용인 명
名(마음)이라는 대별 아래, 명을 다시 수受(감각), 상想(지각), 행行(구성), 식識(의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가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의 현상을 분
석하는 것도 지극히 현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헐 개 충격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이거 쓴 사람 쩐다 원작 쓴 사람도ㄷㄷㄷㄷㄷㄷ

 

 

 

 

불교에서 윤회라는 숙명론이 아니라 연기라는
인과론을 원용할 때, 신의 은총이나 저주와 같은 불가사의한 개념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현
대적이다.

 

>> ㅇㅁㅇ.............................

 

 

 

그러나 불교의 가장 현대적인 측면은 부처가 행동가이지 이론가가 아니
었고, 따라서 불교도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아니
불교가 어떤 종교와도 달리 신비적이지도, 아니 차라리 아예 종교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불교에는 신도, 영생불멸하는 영혼도 없다. 불교에 있는 것
은 도덕적 실천이 가능한 방향과 그것을 향한 아나키적 자유의 왕국인 니르
바나(涅槃)라는 유토피아의 희망이다.

 

>> 헐 감동............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특히 불교가 정치화하고 권력화하며, 상업화
하고 자본화하는 소위 호국불교라는 전통이나 개인적 기복에 급급하거나
기업화하는 경향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비판

 

 

또한 부처를 비롯하여
초기불교는 물론 지금까지도 불교의 기본적 사회단위가 되어 온 자치적이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 . 85
고 자급적인 단위 사회의 이상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현대 인도의 간디적 전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힌두교와 불교, 심지어 기독교의 원상原象도 서로 다를 바 없다고 생
각한다.

 

>>오올..


 

 

특히
불교 특유의 숙명론이나 팔자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불교는 논리와 윤
리와 심리, 지성과 이성과 비판의 정신에 충실한 종교이다. 부처 자신 제자
들에게 자기 말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고 했다. 그 점에서 적어도 정세근
의 책은 불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파괴하는 진정한 불교정신에서 쓰였
다고 할 수 있다.

 

>>아 부처님 짱짱맨

   정세근찡도 짱짱맨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자급자족의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저
자는 간디가 힌두교도이기 때문에 카스트를 긍정했다고 보지만 간디를 비
롯하여 필자가 인도에서 만난 많은 힌두교도는 카스트에 반대했다. 따라서
힌두교도는 무조건 카스트에 찬성하고 불교도는 무조건 카스트에 반대한다
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호...!! 그렇군

  박홍규의 비판

 

 

간디의 현대적 의미는 근대화 국가의 건설자가 아니라 비판
적인 인도 전통주의자, 특히 자치(스와라지)주의자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식민지주의의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와 함께, 중앙
집권화된 관리와 통제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지역 주민이나 노동자의 저항
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또한 그의 비폭력주의란 불교나 자이나교에서 유
래한 것이지만 지금은 해방투쟁이라는 정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중요한 영향의 하나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인권운동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의 아나키즘

 

 

 

<<<이야 한 문단 한 문단 버릴 게 없다

 원래 책도 좋지만 그걸 요약해도 이렇게 이해가 쏙쏙 잘 되고 논지가 이해되게끔 요약한 박홍규도 대단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