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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허호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snachild 2021. 4. 19. 22:48


p.21
자나 깨나 나는 우이코가 죽기를 바랐다. 내 수치의 입회인이 없어져버리기를 바랐다. 증인만 없다면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리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탕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p.55
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58
내가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쓸데없는 웃음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친근감을 주는 계기가 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언제나 자신이 남에게 주는 인상을 일일이 책임질 수는 없었다.
(...)
언제부터인지 금각에의 집념을 오로지 나 자신의 추한 모습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59
곤충 표본 만들기를 좋아하는 소년이 곧잘 그러하듯이, 쓰루카와는 인간의 감정을 자기 방의 잘 정돈된 서랍에 가지런히 분류해 놓고는 때로는 그것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살펴보는 따위의 취미가 있는 듯 하다.

>>곤충 표본은 인간이 아니다. 나와 다르게 징그러운 존재기 때문에 '신기해서' 수집하고 모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갓반인인 쓰루카와는 정병인인 '나'가 '신기해서' 오히려 차분히, 먼 지점에서 이해하고 교제할 수 있는 듯.


p.60
내 감정은 언제나 시기를 놓쳐버린다. 그 결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각기 다른, 고립된, 서로 연결되지 않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미미한 시간의 엇갈림, 미미한 지체가 언제나 내 감정과 사건을 전혀 다른, 마치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관한 듯한 상태로 바꿔버린다. 나에게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떠한 사건이나 동기와도 관련 없이 돌발적으로 이유도 없이 엄습하리라.....

p.67
지금까지는 이 건축의 불후의 시간이 나를 압박하며 멀리하고 있었으나, 머지않아 소이탄의 불에 타버릴 그 운명은 우리들의 운명으로 다가왔다. 금각은 어쩌면 우리들보다 먼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금각은 우리들과 같은 생을 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p.68
금각은 이미 부동의 건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위 현상계의 덧없는 상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현실의 금각은 상상의 금각과 다를바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p.69
이 세상에 나와 금각에게 공통되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고무했다. 미와 나를 연결하는 매체를 발견한 것이다. 나를 거절하며 소외시키고 있는 듯이 여겨졌던 것과의 사이에 다리가 놓였다고 느꼈다.
>>금각과 나 모두 필멸자이며, 순간을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공통 의식을 느낄 수 있는 것임.

p.70
전쟁 덕분에 인생은 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전쟁이란 우리 소년들에게 단지 꿈처럼 실속 없이 바쁜 체험이자 인생의 의미로부터 차단된 격리병실 같은 것이었다.

p.71
내일이야말로 금각이 불타리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형태가 사라지리라... 그 순간 꼭대기의 봉황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날아가리라.

p.72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 같은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p.85
"뛰어밨자 소용없어. 힘만 들지. 다리를 질질 끌고 가면 돼."
"그래서 어머님께 동정받아, 어리광 부릴 작정이로구나."
쓰루카와는 언제나 이런 식의 오해로 가득한 나의 해설자였다. 하지만 그는 내게는 조금도 성가시지 않은, 필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정말로 선의의 통역자, 내 말을 현세의 말로 번역해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
이러한 놀라움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지 감정에 머물러 있는 한에는 이 세상으 ㅣ최악의 감정도 최선의 감정도 차이가 없다는 것, 그 효과는 마찬가지라는 것, 살의도 자비도 겉보기에는 다를 바 없다는 것 등이었다. 

<<3장 초반에는 어머니와 어머니 친척의 상간이 나온다. 이걸 알면서도 아들의 눈으로 가리우는 아버지도... <인간실격>도 그렇고 왜 이런 식으로 여자의 간음을 타락이나 성찰의 계기로 묘사하는 걸까?


 p.93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p.94
'금각과 나와의 관계는 끊겼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나와 금각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몽상은 깨졌다. 다시 원래의, 원래보다 훨씬 절망적인 사태가 시작되리라. 미가 저쪽에 있고 내가 이쪽에 있는 사태.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변함없을 사태....

p.95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들 뺨에, 손에, 배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묻어버리는 영원. 이 저주스러운 것... 

p.96-97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
남천 스님이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르고, 일체의 모순, 대립, 자타의 확집을 끊은 것이다. 이것을 살인도라 일컫는다면, 조주의 그것은 활인검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따라 머리 위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보살도를 실천한 것이다.

p.99
나에게 패전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결고 해방이 아니었다. 불변의 것, 영원한 것, 일상 속에 숨어들어 있는 불교적인 시간의 부활을 의미했다.

p.111
<마더 구스>라는 외국 동요에서 검은 눈을 심술궂고 잔혹하다고 노래하듯이, 인간은 이국적인 것에서 잔혹함을 꿈꾸는 것이 보통일지도 모른다. 

p.123
쓰루카와는 나의 양화라고. (...) 나를 추궁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의 어두운 감정을 몽땅 그대로 밝은 감정으로 번역해야 했다. 그러면 거짓은 진실이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되었을 것이다. 쓰루카와 특유의 그러한 솜씨, 모든 그늘을 양지로, 모든 밤을 낮으로, 모든 달빛을 햇빛으로, 모든 밤의 이끼에 찬 습기를 대낮의 가볍게 흔들리는 눈부신 새싹으로 번역하는 솜씨를 봤더라면, 나도 말을 더듬거리며 숨김없이 참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에 한해 그는 그러한 번역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의 암흑 같은 감정이 힘을 얻은 것이다...

p.136
육체적인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대상화'되는 불구자와 미녀. 둘다 보는 이들의 인식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는 데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일까?

p.146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하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p.152
가시와기는 나에게 수치심의 근원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동시에 나를 인생으로 재촉했다......

p.154
남의 고통과 피와 단말마의 신음을 보는 게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섬세하고 밝고 부드럽게 만드는 데도 말이야. 우리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건, 가령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오후에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스미듯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이 세상의 온갖 악몽, 역사상의 모든 악몽은 그런 식으로 생겨난 거야. 하지만 백일하에 피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치는 사람의 모습은 악몽에 뚜렷한 윤곽을 주고 악몽을 물질화해버리지. 악몽은 우리들의 고뇌가 아니라 타인의 격심한 육체적 고통에 불과하게 되지. 하지만 타인의 아픔은 우리들에게는 느껴지지 않거든.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p.163

나에게 미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것은 인생으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인생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있었다.

 

p.186

나와 밝은 대낮의 세계를 잇는 한 가닥의 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끊어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p.203

음악만큼 생명과 유사한 것은 없었고, 똑같은 미라 하더라도 금각만큼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는 없었다.

 

p.204

미의 무익함, 미가 자신의 체내를 관통하여 흔적도 남지 않드나는 것, 그것이 절대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 가시와기가 사랑한 것은 그것이었다. 미가 나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p.282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을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p.284

중세의 동화 <부상신기>의 서두에 이렇게 씌어 있다. "음양잡기에 말하기를, 기물이 100년을 지나 변하여 정령을 얻고 나서 사람의 마음을 기만한다. 이것을 부상신이라 칭한다고 한다. 이것에 의하여 세속에서는 매년 입춘에 앞서서, 가정집의 낡은 세간을 처분하여 길가에 버리게 된 바, 이를 매불이라 한다. 이것이 곧 100년에서 1년 모자르는 부상신의 재난을 대시하게 된다."

 

p.292

어떠한 것이든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을 부여하는 결단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자유의 근거였다.

 

p.352

세상에 흔히 있는 상냥함이 아니라, 마을을 벗어난 곳에서 나그네에게 쉴 그늘을 제공하는 커다란 나무의 억센 뿌리 같은 상냥함이다. 몹시 거칠게 느껴지는 상냥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