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총서9 : 민음사
p.125
<의식이라는 것은 기억의 흔적을 대신해서 생겨 난다> .... 이에 반해 의식은 그와는 다른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터인데 자극에 대한 방어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에 있어 자극에 대한 방어는 자극의 수용보다 더 중요한 과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자극의 방어기능은 그 자체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체 내에서 작용하고 있는 에너지전환의 특수한 형식들을,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거대한 에너지들의, 모든 것을 균일화시키는
p.126
파괴적인 영향들로부터 보호하려고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p.155
우리가 분위기Aura를, 원래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대상에 있는 분위기는 실용적 대상에서 연습으로 남게 되는 경험에 해당한다.
p.158
(그 앞.. 나는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감각을 느끼게 됨.. 어쩌구저쩌구.. 주체였는데 대상이 되는.. 대상으로부터 응답받는..)
그러니까 아우라의 경험이란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형식을, 무생물 내지 자연적 대상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옮겨놓는 데 있는 것이다.
p.180
<저 좋던 옛날>에는 한때 지구의 품 안에 있던 돌과 천공에 떠 있던 별들이 아직도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던 시대가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하늘 위에서이건 땅 밑에서이건간에 모든 것이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하지 않았고 또 어느 곳으로부터도 운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이 발견된 모든 별들은 점성술의 천궁도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돌들도, 비록 모두가 자로 재어져서 무게가 달아지고 특수한 무게와 강도에 따라 자세히 검증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고 또 그 어떠한 도움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이 인간들과 얘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p.185
소설이 이를테면 제 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기 때문에 ... 이러한 제 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기 때문이다.
p.194
얘기꾼에 있어서는 그의 재료, 즉 그의 살모가의 관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수공업적 관계
얘기꾼이란 그의 삶의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그의 얘기의 불꽃에 의해서 완전히 연소시키는 그런 사람이다.
p.230-1
전쟁의 파괴성은, 사회가 기술을 사회의 유기적 일부로 병합할 수 잇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으며, 또 기술이 사회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p.266
작가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는 <누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견해들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p.293
다윈주의는 사회주의적 역사관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진화론적인 역사관은 그만큼 더 <발전>이라는 개념에 더 많은 부담을 안겨 주었다.
p.374
그것은 이를테면 언제나 동일한 모습을 하고 되풀이되는 신화의 역사이고 또 간단없이 몰락과 파국을 향하여 치닫는 자연의 역사(자연사)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창조주 신의 고통>과 <인간의 피조물성과 육체성의 숙명적 몰락과 덧없음>이 내포되어 있다. 벤야민의 이러한 역사관에는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슬픔과 우수,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지금까지 좌절하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좌절할 것이라는 체념이 도사리고 있다.
p.388
벤야민과는 정반대로 처음부터 20세기의 모더니즘적 예숡과 거의 담을 쌓고 독일고전주의의 예술이념을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루카치의 미학, 벤야민으로부터 그의 미학이론의 결정적 모티브를 구해서 이를 헤겔적 방법론과 <부정적 변증법>의 시각을 가지고 현대의 문화·예술을 폭넓게 다룬 아도르노의 모더니즘적 예술관, 초기의 신비주의적 모티브를 끝까지 추적해서 유토피아와 <희망의 철학>을 정립하고 이로부터 예술의 유토피아적 기능을 추출하고 있는 블로흐의 예술론, 기술고 조직에 의해 획일화된 <일차원적>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억압되고 있는 개인의 내적 욕망과 감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마르쿠제의 예술론ㅡ 이러한 일련의 예술이론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벤야민 예술이론의 특정을 더 선명히 부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초반부의 짧은 에세이와 삽화 같은 글들도 통찰력을 준다. 읽는 재미가 있는 짧은 글들. 학교에 있었던 때라면 시간 없다고 넘겼겠지만 앞부분을 여유있게 찬찬히 읽어보는 경험도 좋았다.
<<중반부는 프란츠 카프카, 보들레르, 프루스트에 대한 작가/작품론에 가깝다. 해당 작가와 작품을 모르기 때문에ㅠㅠ 제일 넘기기 힘들었던 부분. 초반은 보면서 좋았다가 이부분에서 때려칠 뻔ㅋㅋ
<<후반부는 익숙한, <얘기꾼과 소설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번역가의 과제>, <역사철학테제> 등이 있다. 다소 익숙한 부분은 재확인하며 읽을 수 있었기에 재밌었고 말로만 듣다가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적도 있었고. 물론 여전히 완전한 이해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벤야민의 통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벤야민은 역시 "문예이론가"라기보다는 다른 방향의 학자라고 하는 게 맞을듯. 문예 이론, 작품의 심오한 분석이 목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사회와 문화, 뭔가 문화적인지 역사적인지 하는 것 자체를 통찰하는 것에 더 목적이 있었던 학자. 문예이론가는 그의 일부라는 생각뿐..
<<해설에도 나와있듯, 벤야민이 의외로 신비주의적인 학자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러고보니 <아우라> 개념도 사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개념보다는 뭔가 우웅>.< 아우라쨔응 ㅎㅇㅎㅇ 같은 느낌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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