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5
민주주의를 부패와 민중 선동으로, 권위의 약화를 촉진하는 체계로 보는 민주주의 반대자들에게 처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모든 체제 중에서 최악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다른 어떤 체제도 민주주의보다 더 낫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p.124-125
'외부 현실로 이처럼 분석과정을 전환하는 것이 어떻게 '내면의' 리비도적 경제의 영역 쪽에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이미 그 답변을 제시해왔다. 탐정의 활동은 리비도적 가능성, 즉 그 집단의 각 사람이 '현실'의 차원(거기에서는 혼자 뽑혀나온 용의자가 살인자이며 따라서 우리의 무죄의 보증인이다)에서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내적' 진실(즉 실제 살인자가 시체로써 구성된 집단의 욕망을 깨달은 것인 한, 우리는 우리 욕망의 무의식 속에서 살인자들이다)을 폐기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비진실, 탐정의 '해결'이 갖는 실존적 허위가 있다. 즉 탐정은 사실에서의 진실(사실들의 정확함)과 우리의 욕망과 관련한 '내적' 진실 간의 차이를 이용한다. 그는 사실들의 정확성 대신 '내면의' 리비도적 진실과 타협하며 우리의 욕망이 실현됨에 따른 모든 죄에서 우리를 방면시켜주는 것이다. 이같은 욕망의 실현을 죄인만의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리비도적 경제에 관한 한 탐정의 '해결'은 일종의 실현된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탐정은 증명되지 않았더라면 죄의식이 속죄양에게 환영적으로 투사되는 데 그쳤을 것을 '사실들을 통해 증명해낸다'. 즉 그는 그 속죄양이 실제로 유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탐정의 해결이 초래하는 엄청난 즐거움pleasure은 이같은 리비도의 획득, 그 해결로부터 얻은 일종의 잉여 이윤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된 데다가 우리가 그 대가를 지불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가와 탐정의 대조점은 이처럼 분명하다. 정신분석가는 바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 다시 말해 구원할 수 없는 상실("상징적 거세")과 우리를 대면시킨다. '알고 있다고 추정되는 주체'로서의 탐정이 기능하는 방식 또한 그에 따라 변한다. 단순히 현존함으로써 그가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바로 우리가 어떠한 죄에 대해서는 방면되리라는 사실, 즉 우리의 욕망의 실현으로 인한 죄가 '속죄양'으로 '외화'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욕망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보장해준다.
p.196-197
히치코식 얼룩 (...) <새>를 다시 살펴보자. 왜 새들이 공격해오는가? 이처럼 북캘리포니아 작은 마을의 한가로운 일상생활을 궤도이탈시킨,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건에 대해 로빈 우드는 가능한 세 가지의 독해를 제시한다. '우주론적' '생태학적' '가계적' 독해가 그것이다.
첫번째의 '우주론적' 독해에 따르면 새들의 공격은 질서와 체계를 갖춘 (인간의) 코스모스ㅡ표면상으로는 평화로우며 정상적으로 진행되는ㅡ가 언제라도 붕괴될 수 있으며 순수한 우연의 개입으로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히치코크의 우주에 대한 시각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우주의 질서는 항상 기만적이다. 언제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출현할 수 있고, 어떤 외상적 실재가 상징적 순환을 혼란시키기 위해 분출할 수 있는 것이다. (.....)
두번째의 생태학적 독해대로라면 영화의 제목이 전세계의 새들이여, 단결하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태학적 독해에서는 새들이 마침내 인간의 부주의한 개발에 대항하여 일어선 착취당한 자연의 응축으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독해에 힘입어 우리는 히치코크가 공격하는 새들을 참새나 갈매기, 까마귀와 같이 양순하고 비공격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종류에서만 거의 배타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독해는 주요 인물들(멜라니, 미치, 그리고 미치의 어머니)의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 영화의 핵심을 본다. 이 세 인물의 관계는 단지 새들의 공격이라는 '진짜' 플롯에 비해 사소한 부수적 줄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격하는 새들은 단지 그들의 관계 속에서의 근본적인 부조화, 동요, 궤도이탈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
p.222
포르노그라피에서는 타인(스크린 위에 보여지는 사람)이 우리의 관음증적 즐거움의 대상으로 격하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와는 반대로 우리는 실질적으로 대상의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관객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를 성적으로 고조시키려 하는 스크린 위의 배우들이야말로 실제적인 주체인 반면 우리, 즉 관객들은 마비된 대상-시선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p.261
세 영화 모두가 완전한 '현실의 상실'(<브라질>과 <릴리 마를렌>의 주제가, 짐의 찬송가)을 이끌어낼 수 있께 해주는 어떤 초자아의 음성에 집착함으로써만 주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전체주의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캉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감sense of reality'이 '현실성의 실험'에 의해서만 지지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현실은 언제나 어던 초자아적 명령, 즉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명령을 필요로 한다.
p.284
이 대립은 간단히 말해 잘못된 것이다.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기술하는 것은 모더니즘적 기획에 내재하는 이면이며 그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긴장이라고 기술하는 것은 모더니즘을 바로 그 출발에서부터 규정해온 내재적 긴장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든다는 유미주의적, 반(反)보편론적 윤리학은 언제나 모더니즘적 기획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보편적 범주들과 가치들의 계보학적 폭로, 이성의 보편성을 의문시하는 것은 특히 모더니즘적인 과정이 아닌가? 바로 이론적 모더니즘의 본질을, '허위의식'(이데올로기, 도덕성, 자아의)의 배후에 있는 '실재적 내용들'을 드러내는 것은 맑스-니체-프로이트라는 저 위대한 삼인조가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모더니즘 최상의 행위인 이러한 제스처는 이성의 맞붙어 싸우고 있는 억압과 지배의 힘을 자체 내에서 인식하는 것을 수단으로 한 아이러니컬하고 자기파괴적인 제스처ㅡ니체로부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이르기까지 작용하고 있는 제스처ㅡ가 아닌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통의 권위에 균열이 생기자마자 보편적 이성과 그 이성의 파악을 회피하는 특정한 내용 간의 긴장은 필연적이고도 축소할 수 없는 것이 된다.
p.315
맑스주의자라면 사적/공적이라는 분열이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지는 방식을, 즉 그 분열은 특수한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입증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주관적 자아-체험의 가장 내밀한 양식들조차도 사회적 관계들의 지배적인 형식에 의해 이미 '매개'되는 것임을 기세등등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p.316
초자아는 소위 법의 권한으로부터 면제된 법의 대리자다. 초자아는 우리에게 금지하는 것을 스스로 행한다. 우리는 따라서 그 근본적인 패러독스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순결하면 할수록, 즉 우리가 초자아의 명령에 따라 쾌락을 포기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더욱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초자아에 복종하면 할수록 초자아 안에 축적되는 쾌락은 더 커지고 따라서 초자아가 우리에게 가하는 압박도 더 커진다는 것이다.
p.321-322
누가 민주주의의 주체인가? 라캉의 대답은 명확하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사람human person, 즉 욕망과 관심과 신념으로 충만한 '인간man'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정신분석학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추상성 속에 있는, 즉 우리가 그 특수한 내용 모두를 빼낸 뒤에 도달하는 공허한 엄밀성 속에 있는 데카르트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코기토, 즉 공허한 초점을, 혹은 잔여로서의 반성적 자기참조를 낳는 근본적인 회의로 이루어진 데카르트적 과정과 "(인종, 성, 종교, 부, 사회적 지위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라는 모든 민주주의 선언서의 전문 사이에는 구조적인 상동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
민주주의라는 관념에는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의 충만함이나 공동체적 결연의 순수성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개인들의 형식적 연결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 中
(...) 왜 우리가 라캉을 읽어야 하는가. (...) 라캉도 대중문화도 정치학도 모두 모르겠거니와 이 셋을 한 그릇 속에 버무리는 일에 관해서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런데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을 통해 그처럼 야심찬 기획을 펼쳐보이고 있다. (...)
지젝의 관심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그는 결코 아카데미의 푹신함에 묻히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칼날 같은 '현실'과 맞닿게 해놓고서는 그 위험천만한 선택에 대하여 '라캉식으로' 설명해나간다. 결론은 좀 안이한 듯해도 고민의 출발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사라졌고(혹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한 성원으로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똑똑히 목격했던 그의 입장은 그러므로 충분히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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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탐정소설, 영화, 포르노 등 대중문화/예술에 적용해서 풀어낸 책.
- 영문 제목은 Looking Awry. 이거 쓰려고 검색해보자 꽤 예전에 출판된 책이라서 놀랐다. (최근에도 판매중이었기에) 아마 상당히 대중적이고 잘팔리는 이론선가부지.
- 나는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 쬐끔 들춰보고 융도 한 번 들어보고 만 수준이라 라캉은 젠젠 모른다. 라캉 이론을 잘 아는 상태에서 읽었으면 훨씬 좋았을 듯. 이런 경우에는 보통 <삐딱하게 보기>에서 나온 라캉 설명을 라캉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내 기준 현재 시점에서 라캉의 인상 : 욕망 / 인간 욕망의 구조 /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음(욕망은 성취되지 않기에 욕망인) / 주체-대상의 전도... 이런 정도. 별로 라캉은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았는데 그래도 이걸 보니 한 번 들춰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 ㅅㅂ 존나 내 취향인거 아냐 이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솔직히 모르겠고 "맑스주의자라면 사적/공적이라는 분열이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지는 방식을, 즉 그 분열은 특수한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입증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주관적 자아-체험의 가장 내밀한 양식들조차도 사회적 관계들의 지배적인 형식에 의해 이미 '매개'되는 것임을 기세등등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구절 하나 보면서 오 ㅅㅂ 내랑 지향점이 비슷하네 싶었음 (내 안에 잠재된 빨갱이 인자)
- 슬라예보 지젝이 존잘존잘존자라잔존잘졸ㄴ존잘!!!!!!! 인 건 아는데 어떤 책으로 유명한지 모르겠다. 아 폭력의 어쩌구저쩌구? 여튼 존잘이란 것만 알고 폭력에 대해 개멋진 책을 하나 냈다는 것만 알기에 이 책은 내게 있어서 최초로 지젝은 이런 애얌~ 을 전해준 느낌. 내 느낌 : 지젝 젼나 똑똑한 듯. 탐정 소설 해설하는 거 봐라ㄷㄷㄷㄷㄷㄷㄷㄷ 야 그리고 얘 쫌 개혁적이네ㅋ 포르노 설명도 열심히... 야동 사이트 막은 정부야 보고 있냐? 지젝도 이렇게 야동에 대해서 열심히 학문적으로 라캉 이론과 함께 잘 설명하고 있는데. 야동을 '말살해야 하는' 음란물로 규정하는 너님들이 뇌썩인듯.
- 근데 솔직히 책을 대강 읽어서 (보다 이해 안가면 그냥 이해 안하고 눈으로만 읽음) 정확히 포르노그래피가 어떻고 영화가 어떻고 탐정소설이 어떻고는 머리에 안 들어와 있음. 발췌한 게 거의 내가 이해한 전부일듯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아냐 그래도 뭔가 인상이라도 갖게 됐잖아 그것만으로..ㅠㅠ 이 책은 거의 버스에서 오가면서 읽은듯. 보통 책 갖고 다니는데 한동안 계속 들어 있었다.
- 언젠가 추천 받고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놓고(계속 책장에 있었다) 이제야 읽은 책. 새해에도 전공책을 읽어야지 하는 야심찬 기획이었지만 벌써 3월 말이라고 한다. 3월에도 결국 4권 못 채울듯ㅋ 아니야 3일이 남았으니 힘내보자... (근데 존나 힘없음)
- 아 그리고 왜 사람들이 지젝 지젝 하는지 알겠더라. 개똑똑 + 대중문화 해석 개씹존잘 + 골방철학자가 아니라 은근 사회 담론에의 의지..... 알려질만 한듯. 글고 보면 은근 은근 민주주의에 대해 나왔는데 (나는 책을 반도 이해 못해서 모르겠지만 아마 지젝도 이런 민중 참여, 민주주의적 뭔가에 대한 인식이 잇었던듯) 내가 갖고 있는 민주주의의 환상에 대해서 좀 더 거리를 두고 분석적으로 다시 보게 해준 계기를 쬐끔이지만 마련해주었다.
-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면 좋은 게, 굉장히 감정적인 면이 배제되어 있다고 해야하나. 어떤 감정조차 굉장히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함. 이론서다보니 자꾸 이해가 안가고 딱딱하고 잘 안넘어가는데 대신, 이런 면에서 감정 소모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오히려 정신이 피폐해졌을 때 보면 위안이 된다. 뭔가 감정감정한 위로가 되는 책과는 달리 뭔가 다른 느낌의 정신 피폐 방지용. 즉 내가 어떤 감정이어도 어떤 일정한 탄력으로 정신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런 기반이 된다고 해야하나 이런 이론서들을 읽으면... 감정으로 휘어잡은 책은 감정이 안따라오면 인상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런 류의 학문적 깨달음 책은 그런 게 덜해서 나름의 좋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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