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
어쩌면 저자가 동양 및 서양, 현대, 고대 그리고 원시 전설의 차이를 개관하고 나서 추측해 낸 이 신화의 상사성(相似性)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심성에 대한 근본적, 보편적 관심에 치중한 나머지 종족의 심리적 다양성을 무시한 모든 교과서 및 해부도에도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다. ....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p.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p.39
2 비극과 희극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백작은 이 예언적인 말을, 현대적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정신적 의절을 그린 소설의 서두로 삼았다.
....
그리스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 앤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p.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 객관적 세계는 과거의 형태 그대로이나 주관이 강조되면서부터는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냄비 속에서 끓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우유성(偶有性)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헐;; 왜 이렇게 말을 멋지게 하냐 역자도 좋은 사람인듯
p.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그리스인들은, 인류 문명에 대한 최초의 지원으로서 불과 프로메테우스의 초월적인 행적을 전했고, 로마인들은 세계적인 그들 도시의 창건에 관련된 아이네아스를 떠올리며 폐허가 된 트로이아를 떠나 무서운 사자(死者)의 나라 저승으로 따라나섰다.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p.58
또 어쩌면 이것은 이 지점에 앉거나 서거나 나무에 매달린(가령 아티스, 예수, 오딘처럼) 우주적인 남성이나 여성(가령 부처 자신이나 힌두의 춤추는 여신 칼리 같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107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와 부친 살해의 테스트루도는,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p.118
51) 벼락vajra은, 속세의 허망한 현실을 분쇄하는 부처의 영적인 힘(불멸으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화(佛畵)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다. 절대자the Absolute, 혹은 아디 부다가 티베트 상징에서는 Vajra-Dhara, 즉 <금강고를 쥔 사람>으로 표상된다.
우리가 알기로는, 원시적인 종족의 전사들도 종종 자기 무기를 벼락이라고 일컫는다. ... 입문한 전사는 천상적 의지의 대리자다.
도깨비를 깨우친 태자는 숲을 빠져나와 숲 어귀의 인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부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p.12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세계 전역에서, ... 신비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오시리스처럼 그 몸을 난자당하는 등, 세계를 개혁하는 위대한 상징적 행위까지 그 몸으로 짊어졌다.
p.125
4월 스마나흩날은 피의 날Day of Blood로 되어 있다. 대사제는 팔둑의 피를 내어 이를 제물로 삼는다. 하위 성직자들은, 북, 호른, 피리, 제금의 소리에 맞추어,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춘다. 이 춤은 그들이 칼로 몸을 난자하고 뿌린 피가 제단과 나무를 적실 때까지 계속된다. 수도사들은,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본따 스스로를 거세하고는 혼절한다.
비슷한 예로서 남 인도 킬라카레 지역에서는 왕이 20년 치세를 마무리짓는 해에 날을 잡아 엄숙한 제삿날로 삼는다. 이 날에는 나무로 노천 무대를 꾸미고 위에는 비단 천 조각을 늘어뜨린다. 성대한 의식과 음악에 맞추어 목욕 재계한 왕은 신전으로 나아가 신을 경배한다. 이어서 노천 무대로 올라간 왕은 백성들 앞에서 칼을 꺼내고 코, 귀, 입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신체 기관으로부터 되도록이면 많은 양의 살을 베어낸다. 그는 베어낸 살점을 던지며 노천무대를 도는데, 이런 행위는 출혈이 지나쳐 혼절할 때까지 계속된다. 혼절하기 직전, 그는 즉석에서 자기 목을 딴다.
>>ㅎㄷㄷ 하드코어;;;;; 아플텐데 진짜 정신력 최고다
p.133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p.142
수메르의 신화는 서구 세계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p.143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145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자한다. 우리는 이미 브린힐트와 <덩굴장미 아가씨>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이런 여주인공을 만난 바 있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예 예조(預兆)에 해당한다.
p.152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p.190
키아짐바와 에드슈는 무서운 형상을 한 같은 신의(神意)의 다른 얼굴이다. 이 단일한 신은 모순되는 개념, 즉 선 악, 생과 사, 고통과 쾌락, 증여와 박탈을 두루 지니고 있다. 태양의 문이라는 사람이 그렇듯이, 이 신 역시 쌍쌍의 대립물의 원천이다.
p.199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도 지어> 내시었다. ... 즉 <찬양할지라, 거룩하신 이께서 첫 사람을 지어내실 때, 그를 양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寶庫)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이러한 초개인(super individual)을 수렴하려는 비전의 확대를 통해, 개인은 이전보다 더 고상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또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다.
p.480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겨울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부족적 의식이 전해진 적이 있던가? 오히려 모든 의식은, 자연의 휴시고가 더불어 오는 이 혹한의 계절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준비를 촉구한다. 봄이 오면 의식을 통해, 옥수수와 콩과 호박이 싹을 틔우도록 자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의 계절에 합당한 노동을 권면한다.
p.481
이러한 계속성의 상징 체계는, 신화 체계적인 전승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사회면 어느 곳에서든, 얼마든지 발견된다. 가령 아메리카의 수렵 민족의 어떤 부족은 스스로를 반동물, 반인간적 조상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이 조상들은부족의 구성원인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 한 핏줄이라고 믿었다. .....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에 분포해 있는 나바호 인디언들의 호간, 혹은 흙집든, 나바호 족이 믿는 우주의 이미지에 맞추어 지어진다. 입구는 동향이다. ... 인간의 영혼 자체는 우주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이 흙집은 인간과 세계 간의 조화를 상징하며, 완전성에 이르는 삶의 길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즉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느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p.482
우리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죄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러한 호칭은 단지 지리적인 우연, 생년월일이 다르고 수입이 다른 우연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p.483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p.484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갈릴레오의 세기에 이루어졌던 업적이 아니다. 그때는 암흑 시대였지만 지금은 광명의 시대다. 그러나 빛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어둠에 싸여 있다.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p.486
신비와 위험의 영역에 대한 중력의 중심은 옮겨진 지 오래다. 송곳니가 삐죽이
p.487
튀어나온 호랑이, 매머드, 그리고 동물 왕국의 하등한 존재가 이질적인 면(위험의 근원인 동시에 생계의 근원)을 나타내는 게 고작이던 때, 아득한 시절의 원시 수렵인들에게 있어, 굵직한 인간의 문제란, 이러한 존재들과 황야에서 공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저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인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자,이 같은 무의식적인 동일시는 결국 신화적 토템 조상들의 반인 반수적인 모습으로 의식에 떠오르게 되었다. 동물은 인간성의 교사가 되었다. 곧이곧대로의 모방의 행위를 통해 인간의 자아에 대한 효과적인 제거 작업이 자행되었고, 사회는 응집력이 있는 기관으로 되어 갔다.
<<2014.5.21 옮기다가 다시
<<역시 사도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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