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논to문

예의 기원과 유고적 안티노미 / 김상준

snachild 2013. 12. 26. 21:51

예의 기원과 유교적 안티노미 = Confucian Sage King, The Product of Confucian Antinomy
김상준(Kim Sang-jun) (사회와 이론, Vol.- No.7, [2005]) [KCI등재]
간략보기 원문보기기관내무료 복사/대출신청 장바구니담기

 

유교적 안티노미는 르네 지라르가 예리하게 포착해낸 폭력과 성스
러움의 구도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스러
움의 본질은 폭력에 있다. 그러나 지라르 자신은 폭력과 성스러움의
구도 속에서 진정한 안티노미의 계기를 포착해내지 못했다. 왜냐면 그
는 타자를 욕망하는 모방 욕망의 존재로서의 인간은 결국 서로를 향하
는 폭력의 순환을 영원히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폭력에 대한 심연적
공포 그 자체에 머무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의 텍스트는 결
국 희생 제의와 대체 폭력에 대한 한편의 길고 긴 옹호요 정당화로 읽
혀질 수도 있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병렬 배치하였을 뿐이다.

 

>>ㄷㄷㄷ;;;;; ㅇㅁㅇ;;;

 


혹은 독법을 확장하여 지라르를 옹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텍스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의 근원성, 심연에 대한 성찰을 통
해 독자를 폭력을 넘어서는(trans-violence) 대안적 상상력으로 밀고
간다고, 최소한 행간을 통해 결국 그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만일
그를 이렇게 읽는다 하여도, 우리는 단지 안티노미에 이르는 언저리에
간신히 도달할 뿐이다. 지라르는 그 안티노미가 어떤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안티노미의 본령에 대한 서술이
없기에, 그의 텍스트의 행간에서 어른거리는 폭력 너머(trans-violence)
의 대안의 그림자는 우리의 망막에 잔영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러한
대안을 어렴풋이라도 그려보기 위해서는 안티노미의 불과 얼음의 계
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티노미란 필연적으로 없어야 하는 곳에 반드시 있는, 동시에 마찬
가지로 명백한 존재 속에서 절대적인 부재가 도출되어야만 하는 상황
을 말한다. 이는 병렬이 아니라, 병렬의 절대적인 불가능성, 절대적인

모순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그러한 것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안티
노미로 맞서는 지점이 바로 슈월츠가 말하는 종교‧윤리적 초월이 발생
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배타성 없이 성스러움이 폭력이기도
하고 폭력이 성스러움이기도 하는 것이라면, 이 둘의 관계가 이렇듯
쉽게 넘나들면서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라면, 이는 안티노미가 아
니라 진부한 궤변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병렬이 모순 없는 현실로
존재하던 시대는 윤리가 탄생하기 이전, 고대의 괴수가 어둠을 지배하
던 인류의 전(前)역사기일 뿐이다.
성스러움은 결코 폭력이 아니고 폭력은 절대적으로 성스러움일 수
없다. 또한 성스러움은 폭력을 용인할 수 없고, 폭력은 성스러움을 용
인할 수 없다. 안티노미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단호한 상호 배제다.
지라르는 성스러움을 뜻하는 고대 로마어나 희랍어의 sacer, hieros,
kudos, kratos 등이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행사할 때의 마력이나 권위
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함의와 중첩되거나(양가성ambivalence) 그런
말들로부터 유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고대 세계의 이러한 양
가성이 더 이상 병립되지 못하게 되는 지점, 즉 어떤 형태의 윤리적 시
각이 싹트는 시점, 다시 말해서 윤리적 안티노미가 발생하고 전개되는
구체적 지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지점으로부터 안티노미가 작동하는 과정은 이러하다. 먼저 성스
러움은 결코 폭력적일 수 없기 때문에 성스러움은 폭력적으로 제거되
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폭력은 절대적으로 성스러울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은 성스럽게 제거되어야 한다. 즉 폭력과 성스러움은 서로를 제거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이제 성스러움은 폭력을 성스럽게 제거함으로
써 비로써 순수한 성스러움이 된다. 그리고 폭력은 성스러움을 폭력적
으로 제거함으로써 비로써 순수한 폭력이 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폭력과 성스러움은 이제 애매한 또는 심원한(?) 양가성에 의해 병립하
는 것이 아니라 배제, 대립, 투쟁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구체적인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살피려 한다. 그 역사적 실례는 유교의 예론
과 성왕론의 출현, 즉 유교적 안티노미의 출현의 역사다.

 

>>그러니까 이 논문은 르네 지라르적인 걸 유교적인 것들을 통해 까는 것인가?!

 

 

 

그러나 ?서경?의 요임금 묘사에서 우리는 전쟁, 질투, 패륜, 음모, 갈
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
차 존재하지 않는 현세의 군주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구약의 모든 군주는 예외 없이 전쟁 군주이며, 더 나아가
유대 민족의 신인 야훼 자신이 전쟁신이다. 그는 분노하는 신이고 이
교도에 대한 몰살을 명령하는 신이다. 고대 이집트, 바빌론, 메소포타
미아, 그리스, 인도의 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의 희로애락
을 초인적인 스케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적(神的)일 뿐이다. 그들
은 폭력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창조 행위 자체가 폭력에서 유발된다.그러나 ?서경?의 요임금 묘사에서 우리는 전쟁, 질투, 패륜, 음모, 갈
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
차 존재하지 않는 현세의 군주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구약의 모든 군주는 예외 없이 전쟁 군주이며, 더 나아가
유대 민족의 신인 야훼 자신이 전쟁신이다. 그는 분노하는 신이고 이
교도에 대한 몰살을 명령하는 신이다. 고대 이집트, 바빌론, 메소포타
미아, 그리스, 인도의 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의 희로애락
을 초인적인 스케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적(神的)일 뿐이다. 그들
은 폭력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창조 행위 자체가 폭력에서 유발된다.

 

>>이 분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를 잘 모르겠는데 르네 지라르가 (비록 그 통찰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양 문명, 서양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늘 주지할 만한 점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