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타자, 커뮤니케이션 : 레비나스와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생각하기
캐리(Carey, 1989)는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 해독 및 그
효과를 강조하는 전달 모델(transmission model)에 대응해 참여자들의
공동체 의식과 표현 양식을 더 중시하는 의식 모델(ritual model)을 제
시하였으며, 비슷한 맥락에서 피스크(Fiske, 1982)는 메시지 전달과정
과 그 효과를 중시하는 과정학파(process school)에 대응해 의미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호와 부호를 통한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문화
적, 정치적 함의를 강조하는 기호학파(semiotic school)를 제시했다. 스
튜어트(Stewart, 1995, 1996)는 언어를 표상․재현의 도구로 간주하는
재현적 시각(representational view)에 대응해 언어를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로 간주하는 구성적 시각(constitutive view)을 제시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대안적 시각들도 의미의 공유를 커뮤니케이션
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
재론적, 주체중심적 접근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
(Habermas, 1989)의 보편적 화용론에 기초한 공론장 이론은 의미의
공유에 기초한 합의를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요소로 삼고 있다는 점에
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주체중심적 접근의 대표적 모델 중 하나로 간주
해도 좋을 것이다.3)
커뮤니케
이션에 적용하면 이는 전통적인 내용 중심 혹은 메시지 중심, 효과 중
심의 접근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유대 전통(혹은 헤브라이즘)인데, 이는 전철학적인(pre-philosophical) 경
험으로서의 초월(transcendence), 곧 타자(the Other)를 주제화하지 않
고 그에게 무한한 책임을 지는 윤리적 전통이다. 그에게 윤리적 전통
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존재의 정당화 혹은 당위성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 전통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적용하자면 이는 소
통의 상대자를 지식이나 인지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절대적 타자성
(alterity, otherness)을 존중하는 그런 접근을 의미한다. 하지만 레비나
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본질상 개념화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언어적 표상 혹은 재현은 전체적이고 폭력적인 성질을 갖는다고 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존재론적) 언어에 의존하지 않
고 타자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시각은
우리가 지금껏 관습적으로 이해해온 커뮤니케이션을 전면적으로 부정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통적 접근에서는 의미의 정확한 전달
과 인지는 의사소통의 여러 효과를 규정하는 기본적 전제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윤리적) ‘말함(the saying)’과 (존재론적) ‘말해
진 것(the said)’의 구분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사고의 지평을 넓힐 잠
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궁
극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
는 일련의 의사교환 및 표현행위들을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나와 너의 관계(Buber,
1923/1977)라 할 수 있는데, 부버의 영향을 받은 많은 대화론 학자들
은 면대면 상황에서의 대화를 가장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삼
아 그 정치ㆍ문화적 함의를 추구해왔다. 나와 너의 관계를 좀더 확장
하면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정립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커뮤니케이
션 관점에서 강조하는 이해나 합의는 주체에 의한 타자의 포섭 과정이
라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교정할 독특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하
였는데, 이 글은 그러한 가능성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 어렵다... 나새끼 멍청이
라캉과 더불어 타자를 주체 구성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사유를 통해 진정한 윤리적 주체를 구성할 철학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자아를 사유주체
로 삼아왔던 주체철학에 대해 타자의 계시를 강조하는 탈주체의 철학
으로 이해할 수 있다(윤대선, 2009).
레비나스의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은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이 타자(the
Other)에 대한 동일자(the Same)의 특권에 기초해 있다는 반성에서 출
발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적 전통에서 서구철학의 목표는
아르케(arche, 최초의 원리, 원인, 원형), 곧 모든 실재를 전체화하는 중
성적 용어(a neuter term)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은 현상
을 주제화하고 체계적인 이론 정립에 목표를 둠으로써 전체성과 통일
성을 강요하고, 이는 결국 인간폭력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그는 생
각한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개념과 인식에 기초해 현상을 이해하고
자 하는 존재론적 전통에서는 타자의 절대적 다름을 부정하는 폭력으
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은 타자를 자아
의 존재 인식의 틀에 가두어 진리, 역사, 또는 전체의 이름으로 집단
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강영안, 2005, 117쪽).
레비나스는 후설의 현상학은 철학적 사유에 앞서는 전철학
적 경험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고 전체주의 전통과 결별하기 위해 현
상학적 방법을 사용한다(Simmons, 2003). 후설은 서구철학이 주체의
자유를 최고로 간주하는 자아론(egology)으로 귀결되었다고 보고 지향
성 개념에 근거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자율적인 자아라는 생
각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후설의 지향성 개념은 그의
스승 브렌타노에게서 가져온 것으로 의식은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이
라는 것을 의미하는 중세 용어에서 온 것이다. 노에시스(noesis)로서의
지향적 의식은 노에마(noema)인 대상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후설의
지향성 개념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고 주체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
는 자율적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그는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 해석학 또한 여전히 동일자의
지배를 수용한다고 비판한다. 후설이 자율적 이론을 존재보다 더 중시
했다고 하이데거는 비판했지만 그는 대신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인 존
재를 개별 존재자인 인간 위로 승격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존재의
자율성은 그것의 근본적인 존재양식인 이해(com-prehension)로 예시할
수 있는데, 후설에서처럼 이해는 모든 근본적 타자성을 파괴하고 주체
성을 찬양하게 된다고 그는 하이데거를 비판한다(Simmons, 2003). 하
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는 세계 - 내 - 존재 혹은 공동존재(Mit-sein,
being-with)로서 이미 타자와 함께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이론과 부합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실제 이러한 측면이 사회
적 관계로서의 커뮤니케이션에 핵심적 영감을 주었다고 보는 학자들
도 많다(eg. Chang, 1996; Peters, 1999).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
거의 공동존재 개념으로는 근본적 초월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의 이론이 존재자들의 유일성을 존재의 빛이 비추
는 존재지평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뭔가 좋은 논문 같은데 이해가 잘 안감.... 난 철학 쪽 베이스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까 이쪽의 당연한 전제나 용어 사용도 ????? 하게 되겠지...ㅠㅠ 옛날에 공부나 좀 해둘 걸..
주체는 이제 자신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의식주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는데, 이는 주체의 물
질성을 의미한다. 자아가 자신의 거주, 욕구, 그리고 쾌락을 갖는 것
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자아의 경제라고 부른다. 주체는 음식, 의복,
주거 등 일상적 욕구를 감각을 통해 실현하는 신체적 주체로서 세계에
관여하게 되는데, 세계는 신체적 주체가 욕구하는 물질적 기반의 총
체이다. 따라서 세계는 주체에 타자로 다가온다. 세계 안에서의 신체
적 주체의 삶을 레비나스는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향유하는 주
체로서의 존재자가 존재 저편으로 초월하는 계기를 그는 죽음의 경험
에서 찾는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절대타자, 즉 나와는 전적으로 다
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사건이다.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
신할 수 없으며 나 또한 누구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처럼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
른 타자는 나의 내재성(interiority)과는 구별되는 외재성(exteriority)이
고 이타성이다.
레비나스에게 말함으로서의 언어는 내적
사유를 재현하고 사상을 전달하는 그릇이 아니라 관계의 표현이다.
말함으로서의 언어는 통합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형식을 취하기에
앞서 책임의 현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언어는 타자를 위한 것이다. 즉 레비나스에게 윤리적 말함으로서의
언어는 타자와의 관계의 표현, 타자에게 가까이 다가감의 표현이다.
레비나스를 인용하면, “말해진 것의 주제화를 넘어서, 명제로 진술된
내용의 주제화를 넘어서, (말함은)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양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Levinas, 1993, p.142; Pinchevski, 2005, p.220에서
재인용). 말해진 것 수준에서만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타자를 하나의
주제로 환원하는 것이고, 언어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 요소인 윤
리적 관계의 차원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인용에서 잘 드러난다: “말함으로서의 언어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열려 있음이다. 말해진 것으로서의 언어에 대해 말하자
면 ― 고정된 정체성 혹은 공시적 현전으로 환원되어 ― 그것은 타자에
대한 존재론적 폐쇄이다”(Levinas, 1995, p.194; Pinchevski, 2005,
p.220에서 재인용). 레비나스에게 말함으로서의 언어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의미하며, 현재로 환원될 수 없는 전-존재론적인(preontological)
책임을 의미한다. 레비나스(Levinas, 1998a, p.43)에 따르
면, 타자에 대한 책임은 말해진 것 이전에 말함이다. 이를 통해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관계는 언어(말해진 것)에 의해 주제화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언어(말함)를 통해 형
성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말함은 곧 타자에 대한 노출로서 커뮤니케이션을 말
한다.
<<<흑흑흑 이해가 안가..ㅠㅠㅠㅠㅠ 이해가 안가서 읽다가 화가 난다 어헣어허헣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from논to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물 캐릭터의 의인화 연구 : 고양잇과 캐릭터를 중심으로 / 송수미 (70/100) (0) | 2013.11.12 |
---|---|
사이버 매체와 현대의 대중 서사 -매체의 변화와 타자성의 탈 주변화 과정- / 나은진 (0) | 2013.11.12 |
한국 비속어에 드러난 타자화와 권력 담론의 재생산 / 윤수연 (0) | 2013.11.11 |
탈식민주의의 조건 : 에드워드 사이드와 헤테토피아의 변증법 / 이미영 (0) | 2013.11.08 |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메타모포시스 연구 / 김의정 (0) | 201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