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니샤드란 무엇일까..
1) 초기불교는 윤회의 주체를 부정했는가? 그렇지 않다. 석가모니 붓다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설법을 햇으며, 초기불전에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절이 여럿 있다.
2)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무아설과 양립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무상한 오온의 집합을 윤회의 당체로 간주하는 것은 무아설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미세신을 윤회의 주체로 간주하는 우빠니샤드전통은 오온의 상속으로 윤회를 설명하는 불교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새 없는 비행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우빠니샤드전통은 '날지 못하는 새의 비행'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빠니샤드 -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두 사상
아뜨만 개념은 불교의 무아설과 정면으로 상충
우빠니샤드와 불교는 업과 윤회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다는 공통점
브라흐마나 문헌에서는 지옥의 공포가 한층 상세하게 묘사되며, '내세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구체화된다. 희생제에 대한 바른 지식을 지니지 못한 자, 게으름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못한 자는 사후에 다시 죽음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윤회 또는 환생의 개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삶에 대한 문제로 귀결
>>사상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희생제
>>제의를 의미하는 것
브라흐마나시대에 들어 제식의 집행이 중요하게 되었을 때, 리따는 희생제와 동의어가 된다. 까르마라고 불리는 희생제는 삶 전체를 압도하며, 모든 행위는 희생제와 관련하여 규정되어야 한다. 희생제 없이는 어떤 것도 희망하거나 얻을 수 없다. 오직 희생제를 통해서 사람은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 인간 뿐만 아니라 신들도 희생제의 영향 하에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지위를 얻었다. 선행의 힘이 인정되며, 사람의 의무가 강조된다.
>>선행이랑 희생제의랑 무슨 상관이지??
이와 같이 업설의 단초는 브라흐마나문헌에 나타나고 있지만, 윤회 환생의 형태는 아니다.
>>철학적 기반을 살펴보았을 때 업과 윤회가 처음부터 밀착되어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
업의 자기 책임성
자선을 베푼 자들은 달, 즉 소마의 세계로 가며, 이 길이 곧 조상의 길이다. 조상의 길로 간 자들은 그곳에서 스스로의 공덕만큼 살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
>>왜 하필 달일까?
업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도덕적 행위들을 단념시키는 교의가 아니다.
베다시대에는 사람의 길흉화복과 운명이 신(deva)들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들을 위무하기 위한 희생제와 찬가가 종교적인 삶의 핵심이었다.
>>데바라고 하는구나!
브라흐마나시대는 제사지상주의시대였다. 인간의 운명과 행불행은 오직 제사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우빠니샤드에서 확립된 업설은 사람의 운명은 사람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의 운명은 신들이나 제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 최대로 진보적이고 자유의지 넘치는 사상이었을 듯
업은 곧 의지작용
의지작용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를 업설의 고려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열반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만일 예외 없이 모든 행위가 응보로 귀결된다고 가정하면, 본능적인 행위들은 경험세계의 삶에서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열반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하면 심지어 열반 직전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도 숨을 쉬는 등의 행위와 이에 부수하는 응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와!! 그렇구나!! 신기하다
무아윤회의 입장에서는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다니는 영혼, 또는 개아의 이행과 같은 개념은 없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은 이번 생 뿐...
사람이 죽을 때 그의 신체 기관은 해체되어 사라진다. 이생에서 내생으로 옮겨가는 영혼리나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데 어떻게 자기 동일성이 확보되지? 업 개념이 있으려면 결국 그게 이어져야 하는 거잖아
즉 죽음에도 불구하고 업이 지속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A라는 존재와 관련된 업이 B라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A에게 귀속된다는 점이 설명되어야 한다. 사실 까르마가 단지 '행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잠재력'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과정 자체가 까르마의 연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적어도 현상학적 차원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과 단절로 관찰되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체 이외의 어떤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 논문이 재밌다
<잡아함경> 업의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윤회의 주체 문제
>>'개아'라는 말이 있네... 근데 이거 불교 용어였었네;;;
무아설은 윤회하는 경험적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개아의 궁극적인 존재를 부정할 뿐이다. 윤회의 당사자는 곧 가아이며, 오온이다.
>>헐.. 충격....
<<재밌는 논문이었다
<<마음이 심란할 땐 불교 논문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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