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우리 중에는 일본의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이 사소설의 모태가 되었고, 치카마
츠 슈코의 작품 또한 자연주의의 한 지류(支流)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
다. 사회성이나 시대의식을 직접 표출하지 않고, 오로지 낭만주의적인 입장에서 개인의 인
생문제를 관조한 일본의 자연주의. 그리고 작가 개인의 치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그것
을 통하여 인간의 진정한 일면을 나타내고자 한 슈코. 개인의 경험, 즉 좁은 세계관을 중심
으로 문학을 지향했다는 점으로부터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서 치카마츠 슈코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작품은 앞서 소개한 〈別れた妻もの〉
와 〈大阪の遊女もの〉등이다. 이들 작품은, 말하자면 슈코의?사생활을 폭로한?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독자의 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뿐더러, 이 요소야말로 슈코의 문학
을 <사소설>로 규정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들 작품으로 인해 〈はじめて日本独
特の私小説という文学精神は確立された〉라고 평가한 히라노 켄(平野謙)4)의 논리도 적용
하고 있는 기준은 다를 바 없고, 구체적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슈코 자신의 입으로 설명
된다.
>>사생활 폭로가 왜 재미가 있는가? - 탕진으로
조금 비약해서 표현하자면, 이것은 사소설 작가의 초석이라는 위치에 걸맞은?정신?과?
신념?의 피력이다. 「눈 오는 날」에서 인용한 부분과 비교했을 때 두 언설은 완전히 모순
되는 듯 보이지만, ?폭로?에 의탁한 슈코의 의도를 신중하게 되짚어 보면,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이전, 슈코는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의 「文
壇無駄話」란을 통해 간결하게나마 스스로 추구하는 문학의 현실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보
여 주기도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시의 문단에 팽배해 있던 <가쿠야오치>(楽屋落ち)
소설에 대한 회의와 우려였다. 작가가 그 자신과 주변의 사항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문
단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개한 나머지, 일반 독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
는 보편성을 잃어버린 풍조 전반에 대한 초조함. 그리고 한편으로는 역시 자신의 경험을 가
지고, 그것을 객관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법론. 이 두 방향의
엇갈리는 딜레마를 안고, 슈코는 자신의 소설을 통하여?폭로?가 아닌?폭로?를 지향한
것이다.
?폭로?의 어의를 따져보면 <들추어내는 것>(さらけだすこと)과 <드러내는 것>(むき
だしにすること)의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내용의 동의어
이기도 하지만, 폭로하는 주체의 태도와 폭로를 당하는 대상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특히
폭로의 주체와 대상이 동시에 <작가 자신>일 경우 이 차이는 더욱더 확연히 드러난다. 처
음부터 폭로를 목적으로 한 폭로와, 북받치는 감정의 작용에 의해 토로(吐露) 된 폭로의 차
이. 앞의 경우에는 폭로에 상응하는 대가가 뒤따를 것이다. 혹은 그 대가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에 <들추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흔히들 보게 되는 ?모델의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
다. 그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에는 어떠한 대가가 아닌 순전한 자신의 감정표출이 우선이
된다. 작가 자신에 대한 솔직한 태도의 한 형태로써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슈코가
〈견딜 수 없다〉(堪えられない)고 단죄한 것은, 전자의 ?폭로?, 즉 <들추어내는> 일이
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슈코 자신이 실천한 것은 후자의 ?폭로?이었다. 그 특징은
예를 들어 「눈 오는 날」등에 잘 나타나 있고, 실제로 「눈 오는 날」의 작법은 그 자체가
슈코의 <드러내는> 폭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눈 오는 날」이라는 소설을 이끌어 가는 작중화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의 이
야기를 재촉하기도 하고 경청하기도 하는, 즉, 흥을 돋우는 청자(聞き手)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야기의 진행을 유도하는 주체가 <나>나
< >의 폭로의식(들추어내는 일=さらけだし)이 아니라, 감정의 태도, 다시 말하자면
<흥>(興)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자>의 전력을 추궁하기 위해서 첫사랑의 이
야기를 끄집어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자>도, 자신의 비밀스러운 과거가 낱낱이 밝혀질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눈이 내리고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과 같이,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흥을 느껴서, 점차 과거의 자신을 <드러내
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듣는 <나>도, 질투의 상념에 고민하는 일 없이, 〈추억의 흥에
이끌려〉(追憶の興に促され)질 정도의 여유를 가진다. 이곳에 〈개인의 처지에서 유래한
종류도 잡다한 슬픈 기억〉(境遇から由来した種々雑多な悲しい思ひ)을 〈지켜보고 있는 여
러 사람 앞에 폭로〉(衆人環視の前に暴露)하고자 하는 의도 따위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눈 오는 날」이후의 작품들도, 제 추억에 <흥>을 느낀 작가가, 그 흥에 이
끌려, 하나씩 둘씩 자기 자신을 드러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독자와 같은 여러 사
람 앞에 자신을 들추어내기 위한 ?폭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스스럼없이 응대한,
〈거짓 없는 인간의 진실〉(偽らざる人間の真)을 추구한?폭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점을 가지고 「別れたる妻に送る手紙」나 「黒髪」에 대한 분석으로 확대해
나가고자 하지만, 발표시간과 요지원고의 제약이 있기에 그 밖의 사항은 논문을 통해 밝히
고자 한다.
작가는 왜 자기 자신의 일을 쓰고자 하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이 가장 가깝고 쓰기에
도 편리한 제재이기 때문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소설에는?자신만의 세계?라는 구속
의 개념이 개입해 있기에, 좁고 폐쇄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푸념 정도로 오해하는 실수를 범
하기 쉽다. 하지만, 사소설에도 문학이 공유하는 근본적인 질의, 즉 인간에 대한 실천적 물
음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소설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과 감
동을 서술하는(語る) 문학양식이기는 하지만, 이 방법론만으로 사소설의 본질을 결정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위험한 일이다.
사소설은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린 자기 소외의 한 형태라고도 말하여지지만, 반대로 자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보편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추구하는 형태는 아닐지
라도, 혹은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소설이 문학의 한 텍스트로
서 독자들을 향해 발산되는 과정에는, 역으로 작가의 의도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가 형성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사소설 작가는 그 기대를 놓치지 않고 있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발신
(發信)할 수 있기도 하다.
>>이 부분 정말 좋다!! 인용
사소설의 자기 폭로가 왜 의미가 있는지
그런데 왜 역으로 보편적 가치가 형성될 수 있는걸까?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를 혹시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나>라는 존재는 자신의 입을
통하여, 아니면 붓을 통하여 「나」라고 불렸을 때, 더 이상의 <내>가 아니다. 즉 쓰는
<나>와 쓰이는 「나」사이에는 어긋남과 중첩을 경계로 하는 새로운 공간이 형성된다. 어
떤 의미에서는 이 공간을 통하여 <내>가 확산하여지는 것이고, 그러한 「나」를 계속해서
발신함으로 사소설 작가는 보편을 향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후대에 등장한 마키노 신이치(牧野真一)나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치카마츠 슈코가 그것을 발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
려 그는 이 부분에서 <내가 쓴 내용들은 결코 나 자신에게 거짓됨이 없다>는?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의도했던 <감흥>과 <정서>(情緖)만큼은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졌고,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만 한 이런?환상?과 ?열정?이 있었기에 후대에
<사소설>이라 불리는 문학양식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짧아도 좋은 논문
잘 읽고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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