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태계의 문제에서 주목해
야 하는 것은 위기의 담론이 아니라 담론의 위기이다. 앎과 삶이 걷돌고 언어가 사태를 비껴간다
는 것이다.
>>음... 잘 쓴 말이긴 한데 뭔가가;;;
>>언어의 시적 기능이 더 드러나다 보니 메시지가 덜 전달되는?
1. 계몽 담론
역설적으로 이 상식의 빤함 가운데서 그러한 위기들이 속수무책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유통되는 생태담론은 두 가지로 유형화해볼 수 있다. 첫째는 전문가의 계몽담론이고 둘째는
실천 운동가들의 선동담론이다.
>>이건 차라리 서론에 들어갔어야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계몽의 역사를 지나치게 길게 가져가면서 담론을 패턴화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투화된 담론이 어떤 폐해를 낳는지 가령 지금도 매주 주말이면 TV에서 벌어지
는 심야 토론 같은 데서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사회자가 있고 전문가 몇사람이 있으며 참관자
가 있다. 그리고 TV 화면 밖에는 전화를 걸려하거나 걸고 있는 그리고 그냥 지켜보는 수많은 시
청자들이 있다. 이 담론에서 언어의 층위는 저항할 수 없는 구조틀 안에서 계급화되어있다.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지식과 권력이 연계하는 억압구조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사회자는 배
제, 금지, 허용, 권장의 방식으로 담론을 통제하는 권력의 주체가 되고 전문가는 프리미엄을 가진
언어와 특권화된 발언권을 행사하는 지식의 주체가 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토론에서 이들만이
말하는 자이고 나머지는 그저 듣는 자들일뿐이다. 관람자나 시청자가 어쩌다 그들 언어의 틈새를
파고들어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쟁론하려 들면 그러한 시도는 곧 사회자의 검열과 통제의 표
적이 된다. 옳은 말씀이고 좋은 이야기지만 시간 관계상... 어쩌구 하며 마이크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은연중에 그 중단된 발언이 짜증이나 히스테리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
이게 하는 한두마디를 덧붙이고나면 그런 통제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그런 프로그램에 오래
빠져들다 보면 시청자들은 계몽되는 만큼 또한 세뇌되기도 한다.
>>계몽 담론에 대한 비판?!
세뇌?의 가능성?
계급화. 지식과 권력이 연계하는 억압구조 ----- 이게 핵심인듯
더욱 곤란한 것은 어느 시점에서 환골탈태하지 못하고 거듭되는 식상한 어휘들이 더 이상 청
자들의 귀와 가슴을 붙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계몽에 성공하고도 설득에 실패하는 것은 그들의 낡고 상투적인 어휘들
때문이다. 이러한 어휘의 상투성 밑에는 또다른 상투적 믿음이 깔려있으니 가령 미래의 식량사정
을 알려서 식량자원을 귀하게 여기고 바다를 소중히 생각하도록 설득시키는 데에 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즉 꼼꼼하고 엄밀한 데이터가 설득력을 갖는다는 믿음이다.
현상학자 후설이 지적한 대로 실증과학도 그자체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기하학적 명증성이 주술적 신비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계숫자를 꼼꼼히 챙기는 것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공들여서 참신한 어휘와 가슴에 닿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언어의 중요성
2. 선동 담론
1972년은 두가지 사건 때문에 행동의 전위에 나선 생태학자나 환경론자들에게 각별한 감회로
기억될 것이다. 두 사건이란 첫째는 생태론에 관한 광범위한 관심을 세계 지성계에 환기시킨 로
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것이고 둘째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유엔 환경회의가
이른바 스톡홀름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를 세계의 정치 무대에 쟁점으로 부
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문이나 보고서는 화급하면서 절실한 초미의 쟁점들을 부각시키면서도 그 어휘
들은 낡고 구태의연한 것들이었다. 선언문은 헌법 조문처럼 장중한 문체로 일관되어있으며 보고
서는 전문 연구논문처럼 복잡한 통계와 도표들로 채워져있었다.
>>상당히 까시네요..ㄷㄷ;;
우리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도달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전세계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
향에 보다 더 사려 깊은 주의를 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무지, 무관심하다면 우리들은 우리들
의 생명과 복지가 의존할 지구상의 환경에 대해 중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초래하게 된
다. 반대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현명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과 자손을 위해
인류의 필요와 희망에 맞는 환경에서 보다 좋은 생활을 달성할 수 있다. 환경의 질 향상과 좋
은 생활의 창조를 위한 전망은 널리 열려져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열렬하지만 냉정한 정신
과 강력하면서 질서를 갖춘 작업이다. 자연 세계에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협조
하여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식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및 장래 세대를 위
해 인간 환경을 옹호하고 향상시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지상의 목표 즉 평화와 세계적인 경
제 사회 발전의 기본적이고 확고한 목표에 버금가며 또한 조화를 유지하면서 추구되어야할
목표가 되었다.
>>그러네;;; 정말 상투적이고 장중하기만 한.. 어휘도 낡고 구태의연.
날카로운 비판인듯
(하지만 이들을 감동시키는 것만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키
우는 강아지에게 소리지르는 사람들을 동물 학대 죄로 고소할지언정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30만명을 위해서는 손가락 까닥하지 않는 이들을).
>>;;; 정식 논문 글이 아닌가?
어떤 문제 의식인지 나도 매우 통감하나 표현이...
아 근데 이런 표현도 한 편으로는 좋다. 구체적이고 일상어 느낌도 나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서 더 좋은 어투일지도.
이 보고서는 산업화, 인구 증가, 영양 실조, 재생 불능의 자원 고갈, 환경 오염, 생태
계의 파괴등의 성장 패턴이 1972년 현재의 속도대로 가속화된다면 이 지구가 생명체들이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떨어질 시점은 다음 백년 안의 어느 때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로마 클럽 문서의 어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당장에 성장을 멈추라’는 저 선동적인
슬로건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복잡한 통계수치와
난삽한 도표들 뿐이다. 그것은 결코 길섶에서 청개구리 한 마리 잡고 장난하고 있는 한 초등학생
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것을 다치지 않게 숲속으로 되돌려 보내주도록할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초등학생에게는 알수 없는 기호투성이인 로마클럽의 보고서보다 ‘수련은 언제 연못을
덮는가’따위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면서 환경문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살가와지지 않겠는가.
‘연못에 한 송이 수련이 있다. 이 수련은 날마다 두배로 늘어나서 29일 째 되는 날 연못의 반을
덮는다. 연못 전체를 덮는 날은 언제지?’’ ‘다음 29일 째’라고 답하는 꼬마에게 ‘아니지. 바로 그
다음날 그러니까 30일째야’라고 말해주었을 때 말이다.
이제 이렇게 바꿔서 문제를 내보면 어떨까. ‘외국에서 들어온 황소개구리는 니가 잡아서 놀고
있는 우리 토종 청개구리를 잡아먹으며 산다. 저수지에 처음 한 마리였던 황소 개구리가 매일 두
배씩 불어나서 99일 째 저수지의 반을 채웠다. 저수지를 완전히 채우는 날은?’ 꼬마는 당연히 ‘다
음날, 백일째’라고 답하고는 청개구리를 연못가나 풀섶에 놓아주지 않겠는가.
>>음.. 선동 담론으로 왜 개념화했는지도 알겠고 뭔가 좋다.
3. 녹색 환상
둘째는 문화자체에 저항하는 전원파들이다. 이들은 노장의 이념이나 루소, 소로의 신
념을 이상화하며 온갖 기술과 도구를 거부한다. 오토바이를 타느니 차라리 달구지 타는 쪽을 택
하는 것이다. 더러는 가차 없이 짐을 꾸리고 떠나서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소부가 귀를 씻었던 강
물에 발이라도 씻으며 살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표현이 넘 와닿는데ㅋㅋㅋ 패기 넘치는 어투 + 이게 섞여서 뭔가 재밌다.. (나쁜 의미의 재미는 아님)
셋째는 위기 담론의 결론 가운데서 건강관련 항목만을 심각
하게 받아들이는 보신파들이다. 이들은 합리적이면서 이기적이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자신의 몸
이라는 가장 확실한 텍스트 위에서 판정하려 한다.
>>오오... 몸이라는 텍스트. 와우
4. 서사전략
이런 환상을 몰아내고 생태계의 위기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하려면 참신한 어휘를
만들어내고 신나는 메타포를 창안하면서 담론의 환경부터 바꿔가야 한다. 나는 이것을 위해 ‘생
태 담론의 서사화’를 그 전략적 대안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런 제안은 누구도 생태 담론에서 서
사의 타자로만 남아서는 안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TV 토론의 경우를 빗대어서 말하자면 ‘침
묵하는 시청자’의 위치에서 ‘발언하는 참여자’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다.
>>이야 좋다!!!!
우와 우와
이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 폴 리쾨르나 알래스데어 맥킨타이어
가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했을 때 역시 그 명제의 메시지 또한 그러했다. 그러
나 삶자체를 이야기 만들기의 기나긴 여정으로 간주할 때 서사의 객체로 남느냐 주체로 남는냐
는 것은 중대한 문제다.
>>헐
이야 이러한 발상은 생태위기 뿐만 아니라 내가 다루려고 하는 거에도 확장시킬 수 있을 듯??
생태 담론에서 타자로 머물던 비전문가인 나도 서사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전
문가 역시 여기서 한 사람의 이야기꾼으로 타자화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전문가를 한 사람
의 이야기꾼으로 타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단지 담론 환경이 민주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전문가 그룹의 권력 담론 안에서 줄곳 제기되어왔던 문제 곧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을 우리가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장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
할 것이다. 물론 혼란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혼란이 결국 전문가들의 특전적 언어를
정점으로 해서 구성된 담론의 위계가 허물어진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려워해
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런 혼란이 생태계의 위기를 악화시킬 수 없는 것은 버스를 타고 졸
업여행을 하는 여중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풀어놓는 오만가지 수다가 운전기사로 하여 길을 잘
못들게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우와 진짜 좋아...
누구든지 이야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한 사람의 선지자라는 개념을 포기
함으로써 얻어지는 특전이다. 전문가의 담론을 우리의 생태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진리의
언술이 아니라 한 이야기꾼이 자기의 방식으로 털어놓는 생태에 관한 이야기로 수평화시킨다 하
더라도 우리는 생각처럼 많은 것을 다르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계몽 담론 까긔
넘겨듣는다거나 틀리게 듣는 것과 정밀하게 듣고 성의를 다해서 듣는다는 것은 큰 차이를 낳
는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으로 듣는 것과 이야기로서 듣는 것의 차이는 그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
이다. 오히려 졸면서 듣는 진리의 말씀보다는 반짝이는 눈망울과 쫑깃 세운 귀로써 듣는 한편의
동화가 더 가슴에 파고들어 한 사람의 영혼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놓는 법이다. 금세기 철학의
특징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라고 규정지은 리차드 로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리가
저 바깥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장들이 없는 곳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며, 문장은 인간
언어의 구성 요소들이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창안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3) 여기서 언어를
이야기로 바꾸어 놓으면 진리라는 것에 대해 내가 주장하려는 것과 로티가 주장하려는 것 사이
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서의 이야기란 단지 ‘꾸며내는 이야기’ 즉 픽션을 말하지 않는다. 픽션은 소설가 혹은 시인
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일 뿐이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
냐 거짓이냐, 사실대로냐 꾸며대는 것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누가 말하며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
의 차이이다.
>>음 뭔가 픽션을 좀 경시하시는 듯한ㅡㅡ;;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모험을 해야하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줄 수 있는
답은 간단하다. 전문가 담론의 단순한 청취자로 머물 때보다 각자가 이야기의 주체로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좀 더 녹색 환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생태 위기를 더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기 때
문이다.
>>굳굳. 앞에 생활 세계에서 실천~~ 이렇게 말했던 거랑도 맞아 떨어지는 듯
우리가 공동체의 역사성에 신뢰를 보내게 된다면 한 서사 공동체의 청자들을 감동시키는 재미
있고 멋진 이야기들은 결코 경박하게 번지르르한 이야기가 아니라 흔히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부르는 가치들을 지닌 훌륭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4) 그러므로 이
야기 꾸미기 즉 서사화(narration)는 결코 재간이나 입담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시작과 종말을 가
진 플롯이 있어야 하고 지리멸렬해보이는 이야기들이 하나의 윤곽 안으로 수렴되는 종합이 있어
야 하며 이들이 조정되는 시간지평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5) 이야기 꾸미기를 통해 화자는 대체
로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연관 맥락들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생태계란 바
로 총체적이고 전일적 비전으로써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4) Paul.R, Time and Narrative, vol. 3, trans, by Blamey, K. and Pellauer, 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82f 참조.
5) Wood, D,(ed), on Pual Ricoeur, Narrative and Interpretation, Routlege, 1991, 183
>>굳굳
와우!!
이것들 나중에 인용하고 싶네ㄷㄷ
5. 시애틀과 땅의 서사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
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
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 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땅을
팔라는 미 대통령에게 답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7)
>>오오..ㅠㅠ
7) 김종철 편, 녹색평론 선집1, 녹색평론사 1996. 17쪽
이게 출천데 헐ㅋㅋㅋ 이거 내가 막학기 때 빌렸던 책이자나
6. 카뮈와 바다의 서사
나는 곧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렸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어요. 다시금 억지로
눈길을 가져가보았더니 그 까만 점은 간데없이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고함을 지르고, 바보처
럼 구원을 청하려 했는데 문득 그게 다시 나타났어요. 그건 배들이 지나가고 나면 그 뒤에 남
아 떠 다니는 그런 쓰레기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태연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순간적으로 어떤 투신자살자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거에요. 그때 나는 오래 전부터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어떤 생각을 결국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때처럼, 아무 저항없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즉 여러 해 전에 내 등 뒤의 센 강 위에서 울렸었던 그 비명소리가
강물에 실려서 도버 해협의 바닷물로 운반되어가지고는 대양의 끝없는 공간을 거쳐 온 세상
을 쉬지 않고 떠돌다가 내가 그것과 마주치게 된 그 날까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에서건 강에서건, 요컨대 내 받을 세례의 쓰디쓴 물이 있
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계속하여 나를 기다릴 것임을 나는 또한 깨달았습니다.8)
8) 알베르 카뮈, 전락, 김화영 역, 책세상,1994. 114-5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일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
었다. 가령 바닷가에 가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곤 하는 따위인데 발밑의 풀에
부딪치는 찬 물결 소리, 물 속에 몸을 담그는 촉감, 거기서 느끼는 해방감, 그런 것들을 상상
할 때 갑자기 나는 감옥의 담장이 그 얼마나 답답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를 느끼는 것이
다’9)
이 글을 읽고 그 깊은 뜻에서 공감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바다를 식량의 자원으로, 양식장의 공
간으로, 심지어 남몰래 갖다버리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올 이런 식이로구나!!
이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ㅠㅠ
7. 맺으며
생태 위기의 극복을 언어에서 찾아야 한다는 내 주장의 약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느냐 죽
느냐가 걸린 백척간두의 상황을 고작 말이나 만들어내고 이야기나 꾸며내면서 신선놀음으로 덮
어두자는 불온한 발상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말이나 이야기를 삶에서 분리된 기호쯤으
로 생각하는 한 나는 그런 비판에 승복하지 않을 참이다. 내가 말과 이야기에 집착하는 것은 우
리의 삶자체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고 했을 때 그는 이러한 언어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 언어를 떠나서도 존재는 존재할 수 없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자리 잡는 곳은.
그런 것들은 공허한 시니피앙으로서
의 기호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뜻이 거세된 말, 삶에서 겉도는 이야기는 데리다의 멋진 표현
을 차용하자면 정충 없는 정액이요 정자 없는 계란이다. 이것들로 꾸며낼 수 있는 이야기따위는
없다. 기껏해야 삐꺽거리는 소음들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들은 내가 제안하는 말이나 이야기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글쓴이ㅋㅋ 쿨하심ㅋㅋ 마지막 문장ㅋㅋ
물론 나는 또한 나의 제안이 위기 극복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출발점
에 선택해야할 하나의 전략적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서사의 힘을 믿어
야 한다. 루소의 ‘에밀’이 교육의 혁명을,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노예해방을 이끌
어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내가 제안하는 담론의 서사전략들이 행동이 거세된 채 교
착상태에 빠져 계몽과 환상만을 지루하게 거듭 재생산해내는 생태담론의 참여자들에게 단호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리라 믿는 것은 결국 이러한 서사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오마이 갓. 진짜? 에밀 - 교육 혁명, 톰 아저씨 - 노예 해방????
컳
우리가 비록 모두 시애틀이나 카뮈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삶에서 감동적이고 흥미
진진한 이야기 하나 둘쯤은 만들어낼 수 있다. 생태 담론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름없는 평범한 이웃이 들려주는 멋진 이야기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 당신
을, 시장에 장사하는 김씨나 박씨를 생태주의의 투쟁전선으로 분연히 몰아세우게될 지 누가 알겠
는가.
>>크헐ㅋㅋㅋ 마지막 문단.
<<가아끔 좀 질겁스럽기도 하지만 대중과 소통하기 좋은 어투인듯? 글은 잘 쓰심
<<현재에 널려져 있는 담론들을
무슨 담론 무슨 담론으로 묶어서 비판하는 논의 전개 방식은 좋은듯
묶거나. 쪼개거나. 이런 식의 사유법
<<서사 전략은 다시 읽고 필요한 개념. 아이디에이션에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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