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과 윤회 사상의 일상적 수용 태도
삶과 죽음의 윤리적 극복 가능성
Ⅰ 머리말; 업과 윤회를 보는 윤리적 시각. Ⅱ 업과 윤회는 숙명론적인가?
Ⅲ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Ⅳ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Ⅴ 맺음말; 업과 윤회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른바 업(業; kar
man)과 윤회(輪廻; saṃsāra)란 말을 들으면 곧바로 불교를 떠올
릴 정도로 이 두 개념은 불교사상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유무형의 모든 행위들을
일컫는 ‘업’과 그것의 과거 및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의 도덕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윤회’는 불교 고유의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
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
하고 있던 전통적 생사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나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전생에 저질렀
던 나의 잘못, 즉 내가 지은 나쁜 업 때문이며(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부분) 반대로 오늘 내가 향유하는 행복은 과거에 지은 좋은 업
때문이라고(자기 자신을 더욱 되돌아 봐야 할 부분) 생각하면 윤
리적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식
은 미래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곧 업과 윤회의 함축
적인 의미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및 미래는 중단 없이 이어지
고 있는 것이다. 업과 윤회란 관념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역과 계
층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와 같은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영향력 덕분이었다.1) 반드시 그
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윤리이론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라는 생각
을 해 본다.
이 논문은 업과 윤회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들, 예컨
대 업과 윤회의 형성 배경이나 윤회의 주체 논쟁, 그리고 업과 윤
회의 종교적 지향점 등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일단 배제한 채
오직 업과 윤회 사상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어떤 윤리적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논
의해 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업과 윤회의 실천윤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Ⅱ. 업과 윤회는 숙명론적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첫 번째 문제는 이를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도덕적으로
가꾸는 하나의 윤리적 상징이자 교훈적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 다른 사람들은 업과 윤회의 관계를 일종의 운명이나 숙
명,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theodicy)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이는 종교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질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업과 윤회사상은 무심
하기 짝이 없는 신이나 자연 그 자체, 혹은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인 필연성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결정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여 그것의 내용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상태의 업과 윤회를 획득할 희망의 여지가 원
천적으로 차단되고 만다. 이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불행한 삶을
보고도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돕기보다는 그 사람은 그럴만한 업
을 지었을 뿐이라고 여기고 그냥 지나치는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업과 윤
회의 의미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면 어딘가 잘
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맞아요 맞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 업과 윤회는 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인과적
설명이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적 삶의 상태가 이전에 있었던 사
건들에 의해 인과적으로 충분히 설명되든가 아니면 이에 미치지
않거나 둘 가운데 어느 하나란 말이다. 만일 업과 윤회가 이를 완
전하게 설명한다면 이 세상에는 어떠한 진보나 변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이 때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적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과거의 악이 현재의 악을 낳고, 현재의 악이
다시 이에 상응하는 미래의 악을 낳을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만
일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업과 윤회는 더 이상 완벽한 인
과적 설명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업과 윤회는 하나의 체계적
종교이론으로서는 실패한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상
악의 문제를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 세상에는
업과 윤회의 인과성을 벗어난 자연발생적이고 우연적인 악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5) 그렇다면 우리들은 업과
윤회사상으로부터 더욱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윤리의식의 고양을
주문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허... 의미 있는 고찰
Ⅲ.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어
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공덕만큼 보상을 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마땅
한 만큼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것에 비해 더 많이 받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더 적
게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선행과 보상 사이의 논리적 필연
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식은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우주의 질서는 우리가 바라는 정
의의 기대에 대체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선행
분야에서도 냉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건
전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몹쓸
병을 얻어 일찍 죽는다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은 이제 세상에는 도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포자
기의 심정이 되지 않을까?
다른 한편, 도덕적인 선행과 궁극적인 운명 사이에 초자연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종교적 주장은 그와 같은 관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들의 도덕적 기대와 염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정의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
으며, 이와 같은 생각은 정의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범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과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순진무구한 아이는 치명적인 질병
으로 고통을 받는 대신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권
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모습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양
상과 달리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 언젠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사실 등은 모두 한 결 같이 우리들의 뿌리 깊은 정의감의 표현들
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의감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성? 감성? 합리?
그러나 불교적인 의미의 업과 윤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
적인 선악을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되
는 도덕적인 인과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업과 윤회를 거창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자유의지가 발휘되는 범위 안에
서만 작용하는 윤리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상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차원이기 때
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과 윤회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
악의 기원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8) 기
독교에서는 여호와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
로 갈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 불교는 끊임없이 나고 죽는 과정
을 되풀이 해야만 하며 이러한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는 또 다른 수행을 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9)
>>결국 선악이라는 것도 나 자신의, 개인의 인과 안에서..
오히려 이게 위안을 주고 설득력 있는 듯 하다
그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의 원인이 개인적인 차원의 업
에서만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집단적인 업의 결과인지에 대해
서도 따져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대부분 개인을 단
위로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위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특정한 개인만이 아
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의 업이 빚어낸 결과라는 설명도 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은 전자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훗날 대승불교의 보살도윤리에 이르게 되면
나와 남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강조되면서 타인
중심의 자비행이 적극 권장되기도 하지만, 업과 윤회에 대한 불교
의 기본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행위 당사자인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나머지 대승불교에서는 업과
윤회의 원리가 종종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예컨대, 내가 마
음 속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한다고 해서 다른 사
람들이 실제로 그런 공덕을 받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업과 윤회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본인의 행위가 그 과보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두 배의 선업을 쌓았다
고 자랑하는 마음을 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업과 윤회는
무상, 연기와 공, 무아 사상 등과 같은 다른 불교교의와 사상적 연
관성을 맺게 된다.10) 이 과정에서 업과 윤회는 매우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논리로 변형되며 결과적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소박한
본래의 윤리적 의미를 많이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
가이다.
Ⅳ.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업과 윤회가 결코 실재하는 현
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바
뀌게 될까?
>>어떤 면에서는 나아겠지만 오히려 더 나빠지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함. 그러니까 업과 윤회라는 사상이 (그 체념이라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겠지 (?)
<<명쾌한 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유의미한 질문들을 계속 던져 줌. 마치 화두처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종교를 소비하는 계층의 의식
도 급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부
분의 사람들이 세속적인 의미의 감각적 행복을 찾고 있는 현대사
회 속에서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전통적인 의미의 업과 윤회의
관념은 보다 산뜻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업과 윤회사상이 함축하고 있는 은유적 메시지를 부담스
럽지 않은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윤리적 비유로 읽어낼 수 있는
종교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나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평범한
진리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바로 내
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업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들은 지
금 당장 스스로 옷깃을 여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개
인적으로 필자는 업과 윤회를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
분하다고 본다. 적어도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그
이상의 복잡한 논의는 부처님께서도 그러셨듯이 무기(無記)로 간
주해 버리자. 그것이 대부분 중생심으로 살아가기 마련인 우리들
에게 오히려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업과 윤회가 갖고 있
는 종교윤리적 뉘앙스는 가슴에 고이 간직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결론임;; 유의미한 통찰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범박하고 앞뒤가 안맞는 논의로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
Ⅴ. 맺음말; 업과 윤회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사상은 무엇
보다도 목적지향적인 자기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
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내가 행한 만큼 과실을 얻을 수 있다
는 도덕적 추론방식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업은 곧바로 어떤
형태의 과보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
면 나의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행위의 속
성을 규정할 어떤 잠재적인 힘(saṃskāras)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업과 윤회의
문제를 헤어(R. M. Hare)가 말하는, 이른바 직관적인 수준(intuiti
ve level)과 비판적인 수준(critical level)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윤회와 환생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
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이나 직관과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른
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업과 윤회의 원리는 종교적 진리일
수도 있고 연기나 공, 무아와 같은 불교의 다른 교의들과 밀접하
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형이상학
적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대적인 행위원리로 새롭게 가
다듬을 수 있겠는가라는 윤리학적 고민이라고 본다.
>>와우
<<문제의식이나 글의 목적도 좋고
일상적이면서도 충분히 할 법한 고민들을 다각도에서 잘 다뤄주어서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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