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
내 계획에서 변수가 생겨 조금이라도 더 품이 들면 벌컥 화가 치밀었다(내 머리와 블루투스 연동이 되지 않는 이상, 타인이 내 생각과 계획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도.)
p.18
숨이 턱에 찰 만큼 달리거나 허벅지 근육이 터질 정도로 앉았다 일어났다 보면, 존재의 이유, 인생의 의미 자신의 가치 같은 생각들은 땀과 호흡으로 배출되어버린다. 남는 것은 오로지 '선생님이 나를 죽이려는 걸까?'하는 의심과 여기서 살아서 나가겠다는 강렬한 생존 욕구,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일그러지는 얼굴만은 너무나 닮은 필라테스 동지들에 대한 사랑뿐이다. 운동이 끝나면 방금 전까지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p.21
등록과 탈주를 반복하는 동안 헬스클럽이나 복싱 센터를 부수지는 않았다. 부서진 것은 내 통장일뿐.
p.35
소명 의식이란 직업에 요구되는 사명감이고, 소명 의식이란 노동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더라고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의식되는 것에 헌신하는 자세다. 삶의 방식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의지가 작용한다는데 잠깐, 이거 아무리 봐도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등골 빼먹을 때나 쓰는 단어 아니야?!
p.40
1967년, 캐서린 스위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참가한다. 아무도 여성이 참가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경기 참가에 대한 제재 항목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본명 대신 'KV 스위처'라는 이름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p.46
제일 도취되는 순간은 손에 핸드랩(붕대)을 감을 때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핸드랩을 감다 보면, 갑자기 귓가에 <더 파이팅> BGM이 흐르고 "부모님의 원수..." 같은 대사를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은 살아계신데 가오가 뭐라고 그런 패륜을...
p.58
특히 운동 공간의 인싸는 경력이 찰수록 친화력과 오지랖도 함께 차오르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상태여서 그런지 활력이 넘친다. 중년 여성들의 인싸력은 유리알처럼 연약한 2030 여성들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뚫고 훅 들어온다.
p.59
동시에, 내가 받았던 질문(처녀야 애엄마야?)처럼 '인싸'의 접근은 미묘한 영역에 걸쳐 있다. 사생활의 경계와 다양한 삶을 존중하는 감각이 아직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낯선 사람 간의 대화는 곧잘 타인의 정상성을 감별하는 절차로 변모한다. 자칫하면 입방아에 오를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p.60
상대적으로 '어린 여자'라서 나의 몸에 동의 없이 손을 대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촘촘하고 미세한 권력 차에 기반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신체의 자율성을 쉽게 침범당한다. 성인은 함부로 아동에게 뽀뽀하거나 볼을 꼬집고, 정치인은 시장에서 만난 시민의 손을 덥석 잡고, 교사는 학생의 옷차림을 단속하고,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포옹하며 기념 사진을 찍고, 남성은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 경제적 빈곤층은 후원을 요청하는 영상에서 초상권을 포장받지 못한다. 이 접촉과 침범이 '선한 의도'로 포장될수록 약자는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거부하기 힘들다. 이해를 강요 당하기도 한다. 예뻐서, 귀여워서, 도와주고 싶어서(동의 없이 장애인의 신체나 휠체어 인공와우 같은 신체의 일부를 만질 때) 그랬는데...
p.61
인싸는 소위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인사이더'의 준말이다. 낯선 사람에게도 선뜻 다가가는 친화력이 강점이다. 하지만 다수와 잘 어울린다는 장점은 기존 사회의 감수성이나 보편의 기준에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는 특정 생활 양식이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싸와 아싸로 우열을 나누고, 인싸를 권하고, 인싸를 불편해하는 아싸를 사회성이 결여된 자로 몰아간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고 인상 깊었던 부분. 나의 아싸력을 재평가하게 됨.
p.63
결코 인싸의 문법대로 친해지지는 않을 것이며, 무례와 폭력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발언은 과감히 저지하겠다고 다짐한다.
p.65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꾸준히 이어가면 배신 없는 두께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공부와 운동이 일맥상통한다."
p.73
아쿠아로빅을 다니면서 붙인 재미 중 하나는 그 혼종의 플레이 리스트였다. 선생님의 취향, 수강생의 연령과 취향, 운동에 적합한 비트와 리듬을 모두 고려하여 선별된, 모든 것이 뒤섞인, 음악계의 김치치즈피자탕수육 같은, 괴랄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명곡이며 한 시간 동안 음악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는, ..
p.91
<힘 빼기의 기술> - 김하나
힘을 빼야 물에 뜨는 진리와 삶의 태도를 연관 짓는데, 이러한 통찰은 본인의 수영 내공에서 나왔을 것이다.
p.93
2014년부터 초등학교에 생존 수영 교육이 도입되었다. '기구 생존 뜨기', '맨몸 생존 뜨기', '체혼 유지하기', '이동하기' 세월호 참사 이후 뒤늦은 조치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부터라도 꼭 필요한 교육이다.
p.99
과정은 쉽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데 아직도 자궁과 변기가 블루투스 연동이 안 되어서 내가 컵을 들고 안절부절못해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인류는 인간을 달로 보내기 전에 달거리부터 정복해야 하지 않을까?
'미주신경성 실신'
p.109
좋아하는 남자가 자전거를 가르쳐준다길래 외발자전거부 출신의 과거를 숨겼는데 어떻게 못 타는 척하느냐, 자기도 모르게 앞바퀴를 뜰까 봐 걱정이라는 인터넷의 사연
p.113
엄마가 한창 요가에 빠져서 '니 같은' 애들이 요가를 해야 한다고 강력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때 '니 같은' 애들은 컴퓨터를 많이 하고 자세가 불량하여 머지않는 미래에 척추한테 호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집단을 일컫는다.
p.129
운동을 고르거나 내 활동 반경을 짜거나 어떤 일을 계획할 때 중요한 것은 내 몸의 상태와 역량이다. 똑같이 수영을 해도 누구는 중이염에, 누구는 질염에 걸리고 누구는 피부가 뒤집어지지만 누구는 그 구역 물개가 된다. 함께 복싱을 배운 친구 중 누구는 발의 통증 때문에, 누구는 몸에 열이 많아 뛸 때마다 현기증이 나서 그만뒀다. 공북 유산소 운동이 체중 조절에 좋다지만 당뇨 환자에게는 위험하고, 기립성 저혈압이 있다면 낙상 위험이 있는 운동을 피해야 한다.
p.133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렇게 체력과 근력을 선천적 한계로 설정하고, 그 안에 가둬두려는 사회적 압력과 욕망이다.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약한 존재로 여성을 규정하며 통제하기 쉽다.
p.134
<마녀 체력>,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보통 여자 보통 운동>
p.135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여성과 어머니를 이분화하고, 어머니'만은' 강한 존재로 신성화하고 착취하고 싶은 속내를 드러낸다.
p.137
하루하루의 성분. 그런 생각을 하면 운동가기 싫어서 드러누워 있다가도 슬금슬금 움직이게 된다.
p.167
운동의 궤적은 퀘스트를 깨듯 쭉쭉 나아가기만 하는 전진형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멀어진 지점을 찍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나선형에 더 가깝다.
p.169
홈트라니! 나는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정해진 시각이면 혹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홀린 듯 매트를 깔고 유투브를 트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p.172
1998년, 호주제가 있었고, 여자의 초혼 연령은 26.1세여씅며,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 사건'이 6년간의 법적 공밥 끝에 피해자의 승리로 끝난 해다. 지금은 선택지의 일부인 홈트가, 그때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으지도 모른다.
p.189
그런 목적으로 몸을 이해하고 가꾸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될 수 없다.
p.191
내 몸은 그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불시착했듯 우연히 나와 함께하게 되었고, 환불이나 교환 없이 발맞춰야 하는 공동체다. 나와 내 몸은 공존과 돌봄과 협동 속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낄 것이다.
p.194
얼마 후 히린은 폴댄스 강사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혓다. 우리는 이미 30대였는데, 새로운 장래희망이냐고 물었더니 노후대책이라고 대답했다. 대충 네 글자니까 섞어서 쓰고 있다.
p.200
"지금 먹는 것이 6개월 후 내가 된다"
p.202
탄수화물 중독이라 과자,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달고 살았는데 거짓말처럼 끊었다. 이런 음식이 인슐리 분비만 촉진시키고 아무 영양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p.208
그러나 사진을 찍는 일 자체가 거울처럼 자신을 검열하고 대상화하는 효과를 수반한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기록하는 일 또한 검열, 대상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의무감에 기록하는 게 아니라, 시선과 성취를 의식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기록하자.
212쪽
류은숙 <아무튼, 피트니스>
214쪽
왜 못하느냐고 몰하붙이는 대신 왜 못하는지를 알아내고 어떻게든 하게 만들려고 사투를 벌이는 선생님의 진정성에 나도 응답하고 싶었다.
217쪽
국민체력측정 100
237쪽
몇 킬로그램을 배겠다, 오늘은 데드 리프트를 몇 킬로그램 들었으니 다음에는 얼마, 이번에는 몇 킬로미터를 뛰었으니 다음달에는 얼마, 이런 식의 성취를 재미로 즐기면 괜찮지만 성취가 곧 목적이 되면 비교하거나 금방 포기하기 쉽다. 운동은 목적 지향적 행위보다는 지속성이 중요한 그저 매일 반복하는 습관이다.
242쪽
혼자 사는 것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는 일이다. 필요한 만큼 나를 세상과 이어 붙이고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으면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잊혀진다. 결혼은 제도와 혈연으로 그러한 수고를 의무와 일상으로 만든다.
246쪽
여학생이 팔과 디리를 벌리던 1892년 최초의 체육 시간.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구겨져서 걷고 숨 쉬고 말하던 이가, 그 바깥으로 팔을 내지르고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의 희열을. 처음으로 숨이 가빠 벌어지는 입술과 땀이 맺힌 이마를. 누구와도 무관하고, 외부에 기여하지 않는 동작을 오롯이 자신의 육체로 재현하는 기쁨을.
결국 한성부에서 이화학당에 공문을 내어 체조를 즉각 중단하라고 통고했다.여학생이 좀 뛰는 것이 나라님이 개입할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화학당은 체조 수업을 강행했고 연이어 농구와 테니스까지 가르친다. 피구나 시키면서 “여자애들은 원래 운동 싫어한다”라는 헛소리를 하는 전국의 체육 교사는 100년 전 국가 공문도 씹은 스승의 패기를 본받았으면 하네요.
250쪽
“학자는 성직자처럼 살아야 한다.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무조건 운동해라.”
<<성함이 익숙하다 했더니 예전에 같이 수업 들으신 분이었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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