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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선정우 지음. 북바이북.

snachild 2021. 3. 16. 00:17

<<감정화하는 사회 옆에 있어서 그냥 얇길래 가져왔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괜찮아서 아예 이북으로 사버림<<감정화하는 사회 옆에 있어서 그냥 얇길래 가져왔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괜찮아서 아예 이북으로 사버림

 

<<3월 14일 도서관에서 다 읽고 반납

 


5쪽
<이야기 체조>, <스토리 메이커>, <캐릭터 메이커>, <이야기의 명제>로 이어지는 그의 스토리 창작 이론

6-7쪽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좌파적’이란 평가를 받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좌파적이란 한국에서처럼 ‘친 사회주의적’이라거나 ‘반 기업적’이란 의미는 아니다. 일본에선 천황의 존재에 대해 일본 사회 일반과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일본의 현행 소위 ‘평화 헌법
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 또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반대하거나 오키나와, 아이누, 재일 한국인 등에 대해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또 정치적으로는 반 자민당적인 입장을 표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좌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특히 일본 사회 전체가 보다 좌파적이었던 1980년대에 오쓰카 에이지는 우파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햇다고 하니까.

8쪽
‘타르탄 체크 무늬의 남성용 스커트(킬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모습이 실제로는 전통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페이크’였다고 한다(휴 트레버 로퍼). 하지만 역사를 통해 이 무늬의 복장이 ‘스코틀랜드 아이덴티티의 상징’이 된 것은 사실이며, 즉 전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재발견되고 생산된다는 것이다. 또 종교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사회적 유대가 약해짐에 따라 내셔널리즘이 이를 대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국민국가(네이션 스테이트)’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 ‘발명’했다는 것이 홉스봄의 설명이다.

10-11쪽
그 ‘오쓰카 에이지의 흥미로운 관점’의 하나로, 이 책에서 다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피해자 의식을 통한 표현’이란 내용이다. 일본의 소위 ‘넷우익’들이나 국내 인터넷 유저들 중 일부가 ‘피해자 의식’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는 일본의 혐한 시위나 <쿠로코의 농구> 사건(캐릭터 메이커 참조), 그리고 한국의 ‘일간베스트(일베)’ 사이트 출신 학생이 일으킨 테러 사건 및 IS에 참가하기 위해 중동으로 건너간 고등학생의 경우다.
일본의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 즉 ‘재특회’는 외국인인 재일 조선인(재일교포)의 ‘특권’에 대한 비판을 내세운다. 평범한 일본인인 자신들이 특권을 가진 재일교포들과 그 특권을 감싸는 일본의 일부 대기업, 정치인, 매스컴 등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다고 말한다. 또 일베 회원 테러 역시 소위 ‘종북 좌파’에게 우리 사회가 휘말리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심으로 일으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IS 고등학생도 한국 사회가 ‘페미니스트’에 의해 여성 우위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로 놓는 논법인 것이다. 비단 이런 극단적인 사례만이 아니라, 국내 인터넷 상에는 평범한 이들까지도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거나 극단적인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는 사례가 있다. 실제로는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비난을 가하고 있는 대상 때문이 아니라 사회나 계급적인 문제, 혹은 정책적인 문제 탓인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스스로를 ‘피해자’나 ‘약자’의 입장에 두다 보면 오히려 마이너리티를 가해자로 몰아붙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 넷우익의 상당수는 오타쿠층인데, 오타쿠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부당한 비난, 즉 부모나 사회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나쁜 것’으로 보는 시선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마이너리티 계층에 부당한 비난을 한다. 이런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오쓰카는 언급하였다. 또 오쓰카 에이지는 <캐릭터 메이커> 등에서 어떤 폭력이나 사건으로 ‘자아실현’을 하기보다 ‘이야기(스토리)를 만드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는데, 실제로 그것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개별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부분을 고민하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한다.

12-13쪽
이야기론과 자아실현
오쓰카 에이지는 <캐릭터 메이커> 보가오가 후기에서 이야기론을 쓰는 의도에 관해, 범죄나 ‘헤이트 스피치(인종, 성, 종교 차별 등과 관련된 증오 발언)’ 대신 이야기 창작을 통해 ‘자기표현’을 하고 ‘자아실현’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이야기 작법은 오직 프로 작가 지망생에게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들에게 태권도나 피아노를 가르치고, 성인이 댄스나 꽃꽂이 교실에 다니는 것처럼, 이야기 작법론도 작가가 되려는 생각이 딱히 없는 일반인이 배워도 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오쓰카 작법론의 궁극적인 테마인 셈이다.

23쪽
미국의 경우 일본 서브컬쳐에 대한 매우 매니악한 팬층은 1970-1980년대에도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것은 1990년대 말(포켓몬트서 북미 힉트)이라 할 수 있고, 좀 더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200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 서브컬쳐 규모가 축소되면서 팬층이 다시 마니악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24-25쪽
<메카데미아> 컨퍼런스, 마크 스타인 버그라는 연구자가 일본의 미디어 믹스 역사에 대해 발표. 가도카와쇼텐의 설립자 가문에는 가도카와 하루키와 가도카와 쓰구히코라는 두 형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도카와 하루키는 할리우드형 미디어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광고를 통해 ‘일본인 전체가 아는 작품’으로 만드는 방식이죠. 영화 <이누가미 가의 일족>(1976) 개봉 당시 가도카와 하루키는 텔레비전 광고로 물량 공세를 펴서 이누가미 일족이라는 제목을 모든 사람이 알게끔 만들었습니다.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억 인구 중에 책을 사주는 사람은 기껏해야 100만 명 정도, 1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효율적이니지 못한 방법이죠.
하지만 동생 가도가콰 쓰구히코는 그런 물량 공세 대신 계속 책을 사주는 10만 명의 독자, 말하자면 마니아나 오타쿠라 불리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전략을 펼쳤습니다. 일본의 만화 전문점을 중심으로 책을 알리는 데 집중했던 거죠. 그런 마니마형 독자는 한 권에 500엔 하는 저자의 문고본이 아니라, 권당 1200엔이나 하는 고가 단행본의 10만부 시장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로도스도 전기>는 불과 50만 부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 50만 명은 <로도스도 전기>는 물론, 리플레이 책 및 애니메이션이나 관련 상품까지 사줍니다. 시장 규모로 보면 전체의 몇십 분의 1밖에 안 되더라도 보다 마니악한 팬층을 형성한다는 거죠. 즉, 가도카와 쓰구히코는 팬층을 시장 안에 가두는 미디어 전략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케팅 방식을 취하면 독자들이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타이밍에 바로 바로 내줘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독자는 점점 수동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거고요.

26쪽
과거에는 오타쿠가 ‘크리에이터’였는데 지금은 ‘유저’가 된 것

29쪽
>>전쟁 후 비슷한 문제 의식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각각 SF, 문학, 만화 쪽으로 뻗어나감


36쪽
일본에서 미스터리는 192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등장한 문학입니다. 일종의 ‘기기계주의’랄까요. 사회나 인간을 게임이나 퍼즐,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37쪽
1920년대가 일종의 기호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추리소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처럼, 1980-90년대에는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일종의 정보론적인 세계 인식이 대두하기 시작했습니다. 


41-42쪽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모옌의 작품을 출간해도 대부분의 일본 독자는 모옌이 과거 문화대혁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어떤 문화라도 국겨ㅇ을 넘을 때에는 역사로부터 절단되어 서브컬처화됩니다. 
국경을 넘는 순간 원래의 문화에서 단절되어 무국적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지요.

간사이 지방에서는 수정과가 ‘히야시아메’라는 이름으로 서민 생활 속에 정착돼 있습니다만, 그 히야시아메가 사실은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죠. 그런 식으로 국경을 넘어 무국적화되면서 다른 물건이 되기도 하고,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뿌리를 내리기도 하는 등 역사 속의 갖가지 우연이나 필연을 통해 변화하는 것입니다.

51쪽
캐릭터 설정 그림을 제출하면 캐릭터의 컨센서스(consensus, 합의 의견 일치)를 만들기가 쉬워지니까요.

68-69쪽
일본도 근대 초기와 2차대전 이전에는 한국이나 대만을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다민족 국가였죠. 하지만 전후의 일본은 자신들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갖기 시작하면서 타자에 대한 설명 방법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76쪽
다른 누군가를 위해 프로파간다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약한 마음을 커밍아웃 하는 작품은 적어도 엔터테인먼트나 서브컬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서전이나 일기 형태라면 몰라도요. 하지만 서브컬처는 상품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소위 ‘제조사 책임’이라는 것이죠.

78쪽
한국에서는 워낙 ‘정치적’ 입장이 중요했던 시기가 길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라는, 말하자면 일종의 ‘절대악’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다른 것들이 모두 사소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창작과 프로파간다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공감받기 힘들었습니다.
>>이건 현재도 크게 안 달라져서, 강풀의 <26년> 같은 작품이 크게 지지를 받기도 했지. 관련해서는 120쪽 참고.  

81쪽
프로파간다로부터 도망치지는 않지만, 결코 프로파간다가 되지 않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사회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죠.

니와 게이코. <코쿠리코 언덕에서> 각본을 쓴 시나리오 라이터.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까운 각본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파트너로서 집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82쪽
<마루 밑 아리에티> 아이누 민족, 마이너리티를 테마로 한 내용. 일본에서는 소인을 ‘코로봇쿠루’라고 하여 아이누 민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선주민을 가리키거든요. 아이누 민족을 포함한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다뤘다.
그렇기 때문에 <마루 밑 아리에티>라는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 아이누 민족 역사를 모르는 나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단순하게 동화적인 로맨스 애니메이션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일본인의 역사적 감수성에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83쪽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나마 덜 정치적이었거든요. 하지만 이후의 지브리 작품은 철저하게 정치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이지는 않더라도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현실에 접근할 것을 요구합니다. 키키가 어른이 된다가 <마녀배달부 키키>의 주제인 것처럼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을 떠나 어른이 되어 돌아오라, 이것이 <마녀배달부 키키>의 명확한 테마입니다. 자기 자신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다른 장소에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후 <토토로>와 <반딧불의 묘>가 일부러 대립적으로 그렸다, 일부러 동시 개봉해서 같이 보라고 했다고 말하는데 흥미로운 해석이다.

89쪽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 감독 히구치 신지, 각본 안노 히데아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절대로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을 그림.

91쪽
관객이나 독자 등 ‘수용자’의 윤리성. 작가에게 정치적이 되라거나 사회적이 되라는 식의 말은 많이 하지만, 사실은 수용자야말로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93쪽
최근 10여년 간 전쟁을 긍정하는 일본 영화가 꽤 만들어졌는데요. 그것도 히트하니까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윤리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103쪽
나카가미 겐지가 페이크 히스토리를 다루려 했던 것은 독자들이 ‘큰 이야기’(거대서사)를 향해 가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5-106쪽
<고쿠리코 언덕에서> LST(전차양륙함). 지브리의 달콤한 세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현실로 연결되는 기호.

107쪽
현실과 픽션 양쪽 영역에 모두 한 발씩 걸쳐둠으로써 오히려 현실이 픽션의 영향을 받는, 말하자면 ‘픽션의 벽을 뛰쳐나와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

110-111쪽
(오쓰카 에이지) 전후 일본 헌법 긍정.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 기본적 입장.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에 대해 기대도 희망도 갖고 있지 않음. 자본주의 시스템 긍정. 다만 그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이나 결점에 대해서는 수정해나가자는 쪽.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민주주의적’인 입장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에게 과거에 대해 사회자호 그에 관해 배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111쪽
서브컬처가 정치적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정치에 대해 비평적이어야 한다는 것. 정치적인 주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비평이 되어야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112쪽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한국전쟁이라는 설정을 집어넣는 것. 미쟈아키 하야오가 작품에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것은 헌법 위반이다,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메시지를 집어넣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단지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추가함으로써 작품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 뿐이지요. 만화나 애니메이션 안에 틀어박힐 수 있다는 것, 독자나 고나객이 판타지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 서브컬처가 가진 상품으로서의 특징입니다. 독자가 가공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 놀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행위, 그게 바로 ‘크리에이터의 비평’입니다.
>>실제로 이런 기호들은 작품을 더 다층적이고, 다각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더 작품성도 높다고 할 수 있음.

116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위 신자유주의화와 역사 교과서 비판이 일어나 일본군 위안부와 난징대학살에 대해 싣지 말라는 흐름이 생겨났죠.

121쪽
그러나 결과적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면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얼마든지 마음대로 평가해도 된다고 봅니다.


123쪽
또 한가지 역설. 프로파간다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하게 되면 프로파간다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 <전팜 포템킨>. 

129쪽
그들은 자신들의 처치가 어려운 이유가 상류층이나 특권 계급이 아닌 여성이나 외국 이민자와 같은 마이너리티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130쪽
일본의 사관은 자학사관이 아니라 ‘피해자 사관’

131쪽
유대인 - 팔레스타인의 최대 가해자. 홀로코스트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피해자.
중국 - 일본의 피해자. 티베트 등에 대해서는 최대의 가해자.
한국 - 일본에 대한 피해자. 베트남 전쟁에서느ㄴ 베트남의 가해자.
즉 언제든 자신들이 가해자일 수도 있음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는 것. 피해자라는 입장은 특권적.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면, 스스로 반성할 만한 여지가 있다는 것.

132쪽
1990년대 이후부터 젊은 층의 고용 상황 심각. 사회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점점 강해진 것. 이런 마이너스의 감정을 ‘국가의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대상을 다른 쪽으로 전환. 한국이나 중국, 그밖의 아시아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시나리오.

135쪽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긍정을 위해 피해자 의식을 만들 뿐입니다.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은 진짜 피해자와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종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이나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 혹은 일본 내의 마이너리티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내세우는 피해자 의식은 결국 진정한 공감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죠.


<<프로파간다와 작품 활동이라는 부분을 엮은 것들이 매우 흥미롭다. 한국은 오래동안 사회참여소설이 대세였기 때문에, 특히나 이 지점에서 생각하게 해주는 부분이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