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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함께 살기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루만까지 한 권으로 읽는 사회철학> (정성훈 지음)

snachild 2021. 2. 21. 16:00

<<열린 사회와 적들 빌리다가 옆에 있어서 (제목이 흥미로워서) 그냥 같이 빌렸는데... 굉장하다

<<저자는 사회학(철학) 공부 제대로 한 것 같다. 몇 십 페이지 안에 학자들 두 셋의 이론을 녹여내는데... 노련하다. 핵심을 딱딱 짚어주면서도 쉽고 적확한 비유를 들어주는데.... 이건 완전 고수의 느낌이 남 ㄷㄷ (원래 어려운 거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진짜 고수임)

<<이 내력을 보면 괜히 이 책이 2016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의해 세종도서 교양부문이 되었는지 알겠다. ㄷㄷ 근데 일반 대중이 읽기는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충 대학~대학원생 정도가 입문서로 읽기 좋을듯?

<<루만 부분은 기가 막혔다. 루만은 원래도 어렵기로 유명한 학자인데... 이걸 이렇게 쉽게 잘 설명해주는 사람 첨 봄. 역시 루만 연구자. ㄷㄷ

<<근데 루만 좋아하시는 것도 그렇고 곳곳에 느껴지는 톤이 좌파(라기보다는 혁신적? 반골 기질? 정의로움?) 같아서 이거 교수 사회에서 임용 괜찮으시려나... 싶어서 찾아 보니 그냥 연구 교수 / 강사 하시는 건감... 넘나 존잘이신데... 행복하세요.. 

<<사회학자인줄 알았는데 철학 전공이시네. 그래서 나도 잘 공감하고 쏙쏙 이해가며 읽었나 보다. 인문학 베이스 느낌이 물씬 나서.. (원래 난 사회학 책 잘 못 읽음.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문제 의식도 공감이 잘 안 돼서)

<<근데 왜 2008년 이후로 저작이 없으시죠..ㅠㅠ 잘 살고 계시죠...

<<오.. 논문 찾아보니까 <루만의 사회이론에서 체계이론의 상대화>를 2019년에 내셨네. 인천대 가신듯? 

 

 

 

p.17

정치적 괴물이 '주권' 혹은 '국가'라고 불린다면, 경제적 괴물은 '시장경제' 혹은 '자본'으로 불린다. 쉽게 말하자면, 수많은 국민의 지지로 성립한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만이 아니라 수많은 소비자의 선택으로 성장한 삼성과 현대도 괴물이다. 또한 20세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대중문화 비판, 과학기술 비판, 종교적 근본주의 비판은 괴물이 문화와 예술의 모습, 과학과 공학의 모습, 종교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SM과 JYP, 황우석, 스티브 잡스와 애플, 순복음교회도 작은 괴물들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괴물은 바로 '사회'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분적 차별과 절대 권력이 무너진 이후 모든 개이닝 나름대로 자기가 사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가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

 현대 사회라는 괴물은 우리 바깥의 객체가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우리 개인들을 억압한다. 

 

p.25

 정치적 괴물로 한정되지 않는 포괄적인 괴물, 루만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괄하는 체계"인 사회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탄생 이후에야, 즉 경제가 정치로부터의 자율성을 획득한 이후에야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p.26

서양에서는 아시아 제국에서의 왕의 지배가 가정과 부족 단위에서의 가부장적 지배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 일리가 있는 해석이지만,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지배와 다른 요소와 체계가 있을 텐데 (단순 가부장적 지배로 환원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역사도 길었다) 서양인 입장에서 동양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뤄서 그런듯

 

p.27

플라톤의 <국가> 사유재산도 가족도 없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다스리는 공산주의적 이상 사회에 관한 구상을 담고 있다. 

 

p.33

그리스어 폴리스는 라틴어 키비타스civitas로 번역되었다. 키비타스로부터 말의 기나긴 변천과 파생 과정을 거쳐 나온 단어가 문명civilization이다. 

 

p.35

소키에타스 - 시민들에 의한 사교 결사체

유니베르시타스 - 특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보편적 통일체

코뮤니타스 - 자생적인 지역 공동체

그래서 다른 단어와 달리 소키에타스는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시민들의 사교, 결사, 자발적 연대 등의 뉘앙스가 들어있다.

 

p.45

홉스는 자연이 인간을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 모두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는 말로 자연 상태에 대한 서술을 시작한다. 체력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강한 자도 약한 자들이 공모하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육체적 능력은 평등한 편이라고 홉스는 말한다. 그리고 정신적 능력은 체력보다 오히려 더 평등하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서술한 경험주의적 인간관으로부터 나오는 귀결이다.

(...)

인간의 정념을 강조하는 홉스는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기고, 경쟁이 일어나 불신이 조장되며, 이 상황에서는 자기 보존을 위해 폭력이나 계략을 쓰게 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구가 될 수 없고 자시넹 대한 과소평가를 참을 수 없어서 공명심이 커진다고 말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원인은 경쟁, 불신, 공명심glory이며,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p.46-47

자연법과 자연권의 구별

권리가 각자 타고난 '자유'를 뜻하는 반면, 법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부과되는 '강제'와 '금지'를 뜻한다. 

권리를 상호 양도하는 것이 '계약'

'생명권'이라 불릴 수 있는 권리를 계약을 통해 넘겨줄 수 없는 것

 

p.63

종교적 자유를 옹호한 이 책들은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영역들을 종교와 그에 겨룹되어 있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 그 결과, 시장경제의 시대가 열리면서 종교와 도덕의 복합체는 그것이 중세에 가졌던 우주적 보편성을 상실하고 개인의 주관적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p.63-64

'자유주의'라 불리는 이념은 오늘날 넓은 외연을 갖고 있다. 존 롤스처럼 기회 균등을 위해 최소 수혜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평등 지향이 강한 정치적 자유주의자부터 복지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말하는 밀턴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자가 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짚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p.78-79

목적론적 역사철학은 평온하지만 단순한 과거, 분열되고 소외된 현재, 통일과 전면적 회복이 이루어지는 미래의 3단계로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인륜의 전개 과정을 가족, 시민사회, 국가의 세 단계로 서술한다. 가족은 인륜의 직접적 통일, 시민사회는 인륜의 분열과 보편성 형성의 과정(형식적 보편성), 그리고 국가는 인륜의 실체적 보편성이 완성된 것이다. 노년에 헤겔은 이 세 단계를 그리스 사회, 기독교 사회, 프로이센 사회라는 실제 역사의 발전 단계와 동일시했다. 당대 독일(프로이센)의 상태를 역사의 목적으로 정당화한 이러한 반동적 역사철학에 반발하여 마르크스는 전자본주의 사회(과거), 자본주의 사회(현재), 공산주의 사회(미래)의 세 단계로 소외와 회복의 과정을 그렸다.

 

p.80

마르크스는 헤겔의 시민사회를 경제적 '토대'로, 국가와 종교를 정치적, 법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간주하고, 그 토대로 재생산되고 붕괴되는 법칙을 분석한다. (...) <공산주의당 선언>에 담겨있는 구상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지의 발전 -> 프롤레타리아트의 전국적 단결 -> 계급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고양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 ->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의 출현

 

p.81

국가를 거부하는 이러한 대안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괴물을 폐지한 후 일반 의지를 기초로 인민주권이 또 하나의 괴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아기 때문에 나온 것일 테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런 아나키스들과 미래 사회상을 공유하면서도,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현재의 국가를 폐지하기 위한 권력의 쟁취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p.88

마르크스주의와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의 성공 사례로부터 자극 받아 특정한 결과에 대해 특정한 원인을 법칙적으로 귀속시키고자 하였다.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인과록적 설명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제적 토대의 변화(원인)가 정치적 상부구조의 변화(결과)를 낳는다고 보는 것이다. (...) 이런 설명 방식을 '경제주의' 혹은 '경제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도 이런 법칙 귀속을 비판하며, 이를 '역사주의'로 묶어서 비판하고 있다.

 

 

90쪽
뒤르켐 이전에 자살은 도덕적 결단으로 간주되거나(로마의 세네카), 종교적 범죄로 간주되거나(기독교), 정신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었다(근대).
(...)
뒤르켐은 이 탐구의 결과로 자살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통합 수준이 낮은 집단에서 발생하는 ‘이기적 자살’(구교도보다 신교도 자살률이 높음), 통합 수준이 너무 높은 집단에서 발생하는 ‘이타적 자살’(군인), 규제의 부재로 인해 개인이 자기 욕망을 규율하지 못해 무규범 상태에 빠져서 일어나는 ‘아노미적 자살’(상공 계층), 과도하 규제로 인해 절망에 빠져 일어나는 ‘숙명적 자살’(전통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기혼 여성)’이 그 네 가지이다.

91쪽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은 ‘집합 표상’으로서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들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92쪽
베버의 종교사회학 논총 3부작 중 1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그 제목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대비되든 발상을 보이고 있다. (...)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서구에서만 주지주의적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그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직업윤리로부터 찾는 것이다.
94쪽
베버는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둬 자기 스스로 존립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자본주의 정신의 시작점이었던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이나 직업 의무 사상이 사라져버렸다고 진단한다.
96쪽
세계의 탈주술화 = 더 이상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
신이 죽고 세계의 궁극적 의미는 상실되었지만 학자는 나름의 가치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예술가는 나름의 가치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종교인은 나름의 가치로서 신성한 것을 추구한다. 베버는 이러한 근대의 분화된 가치 질서를 ‘가치 다신교’라고 표현한다. (...) 근대 이전에는 모든 공주가 아름다워야 했고 모든 성인이 지혜로워야 했고 모든 철학자는 도덕적으로 탁월해야 했다. 이제 가치 다신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추하게 생긴 위인이 있을 수 있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과학자가 있을 수 있고, 과학적 진리에 반대되는 설교를 하는 성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원성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이렇게 가치 다신교의 시대를 거쳐 된 것이었군...

98쪽
헤게모니는 동의를 기초로 한 이데올로기적 통제이다. 그래서 특정 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될 때 그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예를 들어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성공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기에는 상식으로 통한다.
99쪽
서유럽에서 객관적 조건이 성숙됐음에도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그람시의 답변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적 계급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이 상부구조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람시는 서유럽의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수동적 혁명의 제도화로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즉 프랑스 혁명과 같은 능동적 혁명에 대한 공포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양보해 사회 구성원들의 폭넓은 동의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p.100

대중매체를 잘 활용했던 파시즘의 광풍과 문화산업이 발전한 미국 자본주의의 눈부신 성장은 문화 역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101

고유한 질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양적으로 계산 가능한 사물로 간주하는 의식이 물화된 의식이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로는 인간을 컴퓨터 부품처럼 스펙으로 분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

쉽게 말하자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괴벨스가 만든 광고와 히틀러의 연설에 흥분하여 폭력과 전쟁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독일의) 군중, 그리고 TV와 영화에서 미키마우스와 마릴린 먼로를 보면서 현실을 망각하고 소비에 열중하는 (미국의) 대중이 모두 문화적 괴물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다.

 

p.105

친구 없이 보편적인 친화적 성향만 갖고 있을 만큼

고결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단지 그러한 세계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계를 인간적 세계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류애는 고귀한 감정이지만, 

우리는 평생의 대부분을 인류애보다 작은 연대 속에서 지낸다.

- 마이클 샌델, <민주주의의 불만>

 

p.106

그**가 한나 아렌트이다.

** 필자는 여성 인물에 대해 '그녀'라는 대명사를 쓴다면 남성 인물에 대해서는 '그남'이라는 대명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남'을 널리 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며, 그녀도 그남도 아닌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므로, 인물에 대한 대명사를 '그'로 통일하여 쓰겠다.

>>크... 저자분 젠더 감수성 높은 거 보소. 이런 사소한 각주가 저자의 가치관과 공정성을 보여줘서 저작이 더 신뢰가 간다.

 

p.107

원래 사적 소유는 신성한 것이었으나 근대인들은 소유property와 부wealth를 동일시하고 무소유와 빈곤을 동일시함으로써 사적 생활의 신성함을 파괴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소유 관념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이다.

 

p.116

아렌트는 "여론의 지배"와 "의견의 자유"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본 미국 건국 선조들의 통찰을 높게 평가하면서 "민주주의는 건국 선조들에게 새롭게 유행하는 전제정의 형태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다수의 의견 혹은 이익의 다수성을 따라 만장일치의 정념에 휩쓸리기 쉬운 민주주의에 맞서 의견의 자유를 보장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p.117

그리고 후자가 사라져버린 정당정치의 민주주의란 "대중적 복지와 사적 행복을 주요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지만, 공적 행복과 공적 자유가 다시 소수의 특권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두적"이라고 평가한다.

 

p.118

자유주의는 보편적인 옳음, 권리, 정의 등이 좋음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공동선", 즉 행동의 좋음을 추구하는 정치를 옹호한다. 단, 여기서 공동선이란 개인적 선호의 총합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현재 선호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으며,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공화주의 이론은 자치의 공동선에 필요한 인겨겨적 성질을 함양시키려 한다."

 

p.119

센델 (...)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일어난 사회운동들을 통해 공화주의 이상의 부활을 예감 : 지역사회 개발 법인, 기업형 슈퍼마켓 반대 운동, 뉴어버니즘 등

- New Urbanism : 지역의 스프롤과 도시지역의 쇠퇴를 막기 위해 시작된 도시계획 사조

 

120쪽

샌델은 현재의 주권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자치 공동체들로의 분권화를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되 공동선에 대한 지향을 교육받은 개인들이 참여를 통해 시민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삼고 있다.

 

130쪽

루카치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상품의 '물신숭배'를 지적한 것을 모티프로 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고 비판했다.  '대상성 형식'이란 우리가 어떤 대상(객체)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틀을 뜻한다. 따라서 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것도 사물처럼 측정 또는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 감성, 사회적 관계 등이 모두 점수, 수치 등으로 매겨져 서열화될 수 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스펙'이라는 말은 이러한 물화된 인식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132쪽

주술 시대의 인간은 자신이 대결해야 했던 자연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그 대상에 대한 모방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들소 사냥을 하는 부족은 들소의 탈을 쓰고 춤을 추곤 했다.

 

138쪽

하버마스의 '사회비판'은 생활세계가 그 의사소통적 힘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것, 즉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막아내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141쪽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정보화 견호의 의사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로 서술하며, 그것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의 일반적인 이해 가능성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론장에서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문외한도 부담 없이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공론장은 생활세계라는 드넓은 일상적 상호작용의 저수지를 기반으로 한다. 공론장이 전문 영역들로 분화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생활세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의사소통 구조를 생활세계에 뿌리내리게 하는 자발적 결사체들을 '시민사회'라고 부른다. 

142쪽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의 제도적 핵심을 이루는 것이 "자유의지에 기초하는 비국가적이고 비경제적인 연결망과 자발적 결사체들"이라고 말한다.

 

145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우리의 자발성이 제한되는 영역(체계)과 우리가 좀 더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영역(생활세계)을 구별한다. 이 구별은 선과 악의 구별 같이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회를 다소 비인간적인 영역과 인간적인 영역(괴물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으로 나눈다. 이 두 영역 중 한쪽에는 형식적으로 조직된 세계에 대한 경계심이 투영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세계가 가진 역량에 대한 신뢰가 부여되어 있다. 

 

149쪽

역사학이 기록으로 남겨진 문헌과 발굴된 유물들을 분석하여 그것들을 연속적 서사로 만드는 학문임에 반해, 고고학은 흔적 그 자체를 중시하고 역사의 불연속성을 받아들인다.

>>푸코가 왜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말을 썼는지를 설명해주는 부분.

 

150쪽

(역사는) 예를 들어, 근대에 와서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이 사라진 것은 계몽사상을 통해 인권 의식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과적으로 설명함

반면에 고고학은 한 시기의 기록과 유물이 갖는 특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며, 그것이 다음 시기의 것들과 갖는 단절성을 부각시킨다. 한때 신체형을 통해 작동하던 권력이 감옥의 규율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으로 바뀌었고 인권 이념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훈육하는 인간과학이 권력과 결합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151쪽

계보학은 고고학을 통해 족보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깨달은 후 족보가 부과해온 가문의 의무와 다르게 행하고 아예 가문으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도 있게 하는 태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위반할 수 있도록 동력을 제시하는 방법론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7쪽

그는(푸코) 1968년 혁명 이후 광인을 치료하는 정신병원 의사의 권력, 감옥 수형자를 길들이는 권력, 동성애를 병으로 규정하는 권력 등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한 실천가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권력 관계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158쪽

예를 들어, 섹스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인 고해성사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성욕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성적 행동을 하는가에 관한 담론을 활성화시킨다. 권력-지식이 만들어낸 정교한 성의 장치가 역설적이게도 성 담론의 생산성을 높인 것이다. 우리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이 생산적인 담론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푸코의 이런 위반성을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겠군

 

162쪽

예를 들어,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미래의 향락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기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 또는 자기 배려에는 다른 외적인 목적이 없다.

 푸코의 이러한 '윤리. 영성적 방향 전환'은 많은 노란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주의로 도피했다는 비판, 보수화되었다는 비판 등을 받았다.

(...)

푸코는 비판적 존재론과 존재의 미학을 통해 우리에게 괴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괴물리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위반의 가능성을 모색하라. 하지만 괴물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형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말고 특정한 변형을 시도하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니 우선 자기를 잘 돌보라. 자기를 돌볼 때 괴물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워 절제 있는 삶을 살아라.

 

168쪽

"인간의 사라짐"을 말했던 초기의 푸코와 "자기 배려"를 말하며 다시 인간 주체에 관심을 기울인 후기의 푸코는 상당히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푸코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그 인간을 근대적 지식-권력 혹은 생명-권력에 의해 규올된 인간의 전형으로 간주된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돌보는 인간을 주어진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누구와도 동일시될 수 없는 개인으로 간주한다면, 푸코의 이 두 가지 인간은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 전자가 표준화된 근대인이라면 후자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개성적 인간이며, 이 두 인간은 사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맂 ㅏ신의 양면적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성의 사회구조에 따라 사회화된 '인간 일반human being'과 이렇게 형성된 존재를 고고학적-계보학적인 비판을 통해 비판하는 실험을 하며 자기를 돌보는 유일무이한 '개인individual'을 구별할 수 있다. 인간인 일반은 사회 속에서 정치가, 소비자, 학생 등의 '역할'을 맡을 수 있지만 이런 역할로서의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들로 환원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개인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만 한 자신을 비판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적 삶을 시도할 수 있다.

 

>>저자의 이런 푸코 해석은 타당해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푸코 -> 루만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흐름이 기가 막힌다 b

 

 

172쪽

인간은 몸으로는 생명 체계, 의식적으로는 심리적 체계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적 체계일 수는 없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의 층위에서 인간은 인격person으로 관찰된다고 말한다. 인격이란 커뮤니케이션들이 자기생산을 위해 주소지로 사용하는 것이다.

>> 주어가 '커뮤니케이션'이여... 루만 철학의 독특한 부분을 말해주는 부분. 이제까지 다 인간 관점에서 이루어지던 논의들을, 루만은 인간을 '환경'으로 해석하며 신선한 관점을 제시했다

 

175쪽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다는 룸나의 주장은 사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루만은 지금까지 사회학이 가졌던 인식론적 장애물의 첫 번째를 "사회는 구체적인 인간들로,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이라고 말한다. 루만에게 있어 사회의 요소는 오직 커뮤니케이션들인 것이다.

 

180쪽

중세까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종교'와 '도덕'이 보장했다. 정치와 법은 이러한 포괄적 도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악마적 예술이나 신성하지 못한 진리는 배척당했다. 그에 반해, 현대화 과정에 분화된 매체들인 권력, 소유, 진리, 사랑, 예술, 가치들과 권력의 이차 코드화 매체인 법, 소유의 이차 코드화 매체인 화폐 등은 각각의 맥락에서만 "제안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거절이 개연적인 경우에도 수용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갖는다.

 

181쪽

기능체계들은 미래에 생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누가 필요할지를 미리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신분이나 특정 집단만이 사횢거으로 포함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누가 물리학의 난제를 해결할지, 누가 새로운 음악 세계를 열어젖힐지, 누가 아이폰을 뛰어넘는 혁식적인 상품을 내놓을지 미리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평등한 기본적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루만은 인권을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명령"이라고 부른다.

 

182쪽

기능체계뜰 간의 상호견제가 약화되면, 목적 지향이 강한 기능 체계들은 고유의 실적 추구에 전념할 뿐 전체 사회를 고려하지 않는다. 루만은 1990년대의 저서들에게 경제, 학문 등 목적 지향이 강한 체계들은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는데 반해, 목적 지향이 약한 면역 체계인 법은 세계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국내법에 의존한 국제법에 머물면서 침식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법이 보장하던 규범적 기대의 안정화와 헌법적 기본권 보장은 약화된다. 

(...)

탈부화란 각 기능 영역들의 자율성이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192쪽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부족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01쪽

아렌트는 아이히만과 같이 평범한인간이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은 어리석음과는 다른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tlessness"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 사유하지 않음

 

203-204쪽

이 참사에 연루된 자들의 무반성성은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한 고민의 결여와 연결되어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제 일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시대에는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그 일을 잘 해내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지혜로운 자는 통치자가 되어 잘 다스리면 되었고, 용감한 자는 수호자가 되어 나라를 잘 지키면 되었고, 근면한 자는 생산자가 되어 열심이 일하면 되었다. 그런데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상충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역할을 맡을 뿐 아니라 한 역할 내의 세부 업무들 간에도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잘 해내야 할 '제 일'

적당히 해내기만 하면 되는 '그저 그런 일'

자기가 적임자가 아니기에 '맡아선 안 될 일'

그리고 부당하기에 '해서는 안 될 일'

 

205쪽

평범한 인간들의 무반성적 삶이 앙상블을 이루어 일어나는 비극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나와 함께 사는, 그래서 나에게 여러 가지 삶의 보람과 쓰라림을 동시에 안겨다주는 저 사회는 다맥락적이다. 나는 사회와 함께 살기 위해 학자로도, 선생으로도, 소비자로도, 소송인으로도, 당원으로도 살지만, 그 역할들 중 어느 것도 진정한 나는 아니다. "나는 나다"라는 공허한 동어반복을 인정할 때에만,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비추어볼 수 있을 때만, 나는 '사회와 함께 살며 사람되기'라는 힘겨운 과정을 계속해갈 수 있다.

 

209-210쪽

사회철학을 전공한 몇몇 선배들은 내게 루만이 이론적 설득력은 높을지 몰라도 현대 사회 비판을 위한 규범적 척도를 제시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보수주의적 함의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구좌파의 단순한 도식들을 반복할 수 없고 신좌파의 개념적 모호함과 설명력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나는 일단 '규범'보다는 '사실'에 충실하게 접근하는 이론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212쪽

하나의 이론은 학문 외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제든 법적, 정치적, 도덕적 커뮤니케이션과 연결될 수 있고, 이때 어떻게 연결될지는 학적 커뮤니케이션의 발신자가 결정할 수 없다.

>>이런 표현 되게 루만 연구자 같다ㅋㅋ

예를 들어, 비판이론이 보수 정치의 정당화에 이용될 수도 있고 체계이론이 급진적 저항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

>>맞는 말ㄷㄷ

 

214쪽

전지구적 연결망을 갖추고 전문 영역들로 분화된 현대 사회 덕택에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루만에 이르는 수많은 사회철학자들의 책과 전자논문을 읽는 즐거움을 누려왔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볼 때 매우 기이한 행동들, 예를 들어 밤에 자야 하는 동물이 야행성 행동을 한다거나 왕성한 번식기에 피임을 한다거나 하는 비개연적인 삶을 살았다. (...) 우리가 괴물과 함께 살며 누리는 즐거움과 그로 인해 겪는 괴로움, 그리고 괴물 덕분에 획득한 능력과 그로 인해 포기한 능력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