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SF, 장르의 발생과 정치적 무의식: 복거일과 듀나의 SF를 중심으로 : [특집 1]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희망의 원리’(블로흐)보다는‘부정변증법’(아도르노)이 여
전히 대세다.
한국문학의 장르적 정체성이 급격한 해체를 겪고 있으며, 또한 각 문학
장르간의 이질혼효(異質混淆)가 두드러지는 현상은 더이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SF 장르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복거일(卜鉅一)과
듀나의 SF를 다루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예로,
이미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김영하의『검은 꽃』, 김훈의『칼의 노
래』, 신경숙의『리진』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뉴에이지 역사소설’(서영
채)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는 역사소설의 한 경향을 보자. 이 작가들은 공
적이며 기록사관적인 역사 개념을 내파하면서 좀더 은밀하고 숨겨진 역
사적 재료들의 틈새에 잠입하여 자신만의 또다른 서사를 상상적으로 주
조해낸다. 거기에 마술적 활극(김영하), 내적 독백(김훈), 로맨스(신경숙) 등
의 장르가 역사소설 장르에 이접되면서 장르 혼효현상이 가속화되고 있
다.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해체의 좀더 단순한 과정은 이인화, 김
탁환의 역사소설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소설에서 역사는 반영으로서
의 현재의 전사(前史)가 아닐뿐더러, 앞서 언급한 김영하 같은 작가들이
염두에 두는 장르적 대당(counterpart)도 아니다. 역사는 이인화, 김탁환
등의 작가들에게는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미장쎈이나 장신구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작가들이 그려내는 역사는 조선후기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탈
현대로 통째로 옮겨놓은 박물관과 흡사하다. 그들의 소설에서 18~19세기
의 조선은 포스트모던한 중세로 뒤바뀌게 되며, 구한말이나 1930년대의
샹하이에 대한 모방에서 역사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
니라 낭만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 집단적 기억보다는 영웅서사적
주인공의 사적 전유물로 둔갑하는 고고학적 토포스(topos)가 된다.
그에 따르면, 전산망과 과학소설은“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 질서
보단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질서를 불러오는 특성을 지녔”(298면)다고
한다. 복거일이 염두에 두는 SF가 자유민주주의적 유토피아의 정체(政體)
를 상상적으로 구현하는 한편, 그런 프로젝트에 걸림돌이 되는 전체주의
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천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사고실험의 성격이 강한 두번째 단편집
『면세구역』에서 듀나는 씨스템의 무한증식의 부산물인‘면세구역’같은
위상학적인 공간에 대한 탐색,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 나비효과 같은 카
오스이론, 영혼불멸의 현대적 판본인 유전자 복제, 데까르뜨적인‘전능한
악마의 가설’에 발단을 둔 음모론, 도플갱어, 인간과 기계의 위상 등의 무
거운 주제를 실험적이면서도 재치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언오가 침착하게
시낭으로부터 필요한 도구들을 꺼내어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를 든‘엔지
니어’에 가깝다면, 듀나의 주인공은 그 전체를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고
그러하기에 전체의 부분들이 대단히 위협적인 대상으로 다가오는 세계의
음모전략에 맞서 자신만의 대항서사를 구축하는‘브리꼴뢰르’(bricoleur)
다. 이런 대항서사의 결말은『대리전』과 비교해볼 때 그리 체념적이지 않
다.『 용의 이』의 마지막에서 초경(初經)을 겪은 열두살 소녀인‘나’가 행성
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일종의‘인지적 지도’(cognitive map)를 작성
하는장면도순전히다음을위해서다.“ 이제뭐하고놀까?”『( 용의이』386면)
SF를‘인지적 낯섦’(cognitive estrangement)의 효과를 통해 대안사회
와 정체를 구상하는 장르라고 정의내린 비평가 다꼬 써빈(Darko Suvin)
은 SF와 유토피아의 관계에 대해 간명하지만 인상적인 지적을 한 바 있
다.“ 유토피아는 SF의 사회정치적 하위장르다.”7) 이 정의는 SF가 대안사
회와 정치라는 유토피아적 내용을 담는 하나의 문학형식이나 장르라는
일반적 뜻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 정의는 SF는 구조적으로 대안사회
와 정치에 대한, 한마디로 유토피아적 모델을 어떤 식으로든 포함할 수밖
에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른 말로 하면, 유토피아는 SF 텍스트의 직물
을 짜는 욕망의 근원적 움직임이다. SF를 읽는 비평가에게 유토피아의 독
해라는 추가적 난제를 던져주는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복거일의 SF에서 표방되는 유토피아의 구체(具體)는 일관되게 그의 실
용주의적 자유주의 이념을 모델로 하는 정치경제적 사회다. 그러나 복거
일이 SF라는 형식으로 자유라는 내용을 전달할 때,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신다윈주의적 생존기계, 애덤 스미스에서 하이에크에 이르
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라는 저‘과학’을 지칭하는 일련의 계열체는 자유
시장경제의 불평등하고도 살벌한 현실을 자연화하고 합리화하는‘자생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예를 들면‘자유’라는 기표는 복거일의 SF에서 그
의미가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체제의 변동에 대한 낙관적 기술(記
述)에서 사회적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의로 변신
하고, 마침내 그런 체제를 갖추지 않은 국가에 대한 맹렬한 적의로 전치
(轉置)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치과정은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적대적 긴장
을 토대로 존속해온 시장경제 근간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90년대 이후에
존속하는 방식이 아닌가. 복거일의 SF는 그 과정의 서사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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