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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율성 연구 : 칸트에서 아도르노까지 / 두미혜 (2)

snachild 2014. 10. 28. 20:19
 
예술의 자율성 연구 : 칸트에서부터 아도르노까지 = Über die Autonomie der Kunst -von Kant bis Adorno-
두미혜, 대구대학교,[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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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거에는 예술의 자율성이 흔히 사회적․종교적 목적을 위한 부수
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유용성의 그늘에서 부정되었지만,현대사회에서의 예술
은 그러한 유용성의 강압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예술가들은 자율적인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예술은
타율적인 지배관계 하에 놓이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아도르노.. 아도르노가 나오다니... (예술의 자율성 논의에서 중요한 학자인듯)

 

 

이처럼 오늘날의 예술은 창작 활동과 감상 모두 과거보다는 좀 더 자유로
운 상태가 되었다.작품을 통해 어떤 내용으로 감흥을 받아 감상을 했느냐는
내용상의 문제에서 이제 개인 주체의 몫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태어나는 예술들은 중세 예술의 근본정신이었던 종교적인 색채에서
도 자유롭게 되었으며,일부 상부계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소재나 기법으로 인
한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과거보다 좀 더 자유롭게 되었다.즉,예술가 자신이
나,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모두가 예술의 자율성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
여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은 ‘미학
(Ästhetik)’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한데,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가령 인간의 ‘지성’
은 인식론에서,‘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하지만 ㅡ 당시만 하더라도
ㅡ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바움가르텐은 적어도 예술이 감성
의 문제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10)

 

 

>>'미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쉴러의 미적 교육론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의 적대적 분화에 대한 대응의 산물
이라 할 수 있다.쉴러는 인간을 도구화하고 소외시키는 억압적 사회현실이 곧 예
술을 기능화하는 현실적 제약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으며,그
러한 도구적 합리성에 맞서서 예술이 끝까지 현실 긍정적 이데올로기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한다.그런 점에서 쉴러에게
예술의 자율성은 인간을 도구적 예속상태에서 해방시켜 자율적 주체로 세우기 위

한 열망의 표현이었다.”17)

 

 

있다.미학 개념으로서의
자율성 개념은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를 포괄하는 예술시대에 와
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 개념으로 정착18)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 예술의 자율성 문제는 미학의 하위 개념인 것인가 (그렇겠지)

 그렇다면 '미학적'이라는 것의 범주는? 논리적 이성적 체계의 글이 아닌 문학적 형상화 방식을 이용하는 작품, 텍스트, 콘텐츠들은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들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느 ㄴ것인가

 

 

1.예술의 탈기술화20)와 탈존재론화21)
체계이론가인 플룸페는 현대 예술의 출발점을 탈기술화와 탈존재론화로 상
정한다.

 

 

20)플룸페는 ‘탈기술화(Enttechnisierung)’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자유로운
것이든,아름다운 것이든,기계적인 것이든 상관없이,우리가 규칙에 따르는 숙련된
능력들이라고 알게 된 과거의 예술들에 맞서 예술이 분화되었다.인식과 활동들을
결합한 것은 바로 기술들이었다.현대예술은 그에 맞서 이러한 기술적 패러다임들
너머에서 서술되며,따라서 그 자체의 존재방식을 규정할 때 진리나 유용성에 대한
논의를 포기한다.이로써 예술은 ‘탈기술화’되었다.”같은 책,65쪽 참조.

 

>>예술의 탈기술화라는 것은 예술을 할 때 기술이 필요없다라는 소리가 아니라

  기술을 숙련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러한 유용성과 쓸모의 영역(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독자적인 영역이 성립했다는 것에 가까울듯

 

 리고 이러한 현대 예술의 움직임 속에서 “천재22)적 주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플룸페는 천재적 주체의 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즉 천재적 주체
의 등장은 예상할 수도 없고 그에 따라 계산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모든 예술작품들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며,예술이 세계에 대한 다른 태도들에 맞서
특유하게 지니는 차이를 서술하는 데 적합한 공식이라는 것이다.

 

>>난 이 천재적 주체 쫌 반댈세

 

 

예를 들어 우리의 역사에서 살펴보면,이제까지 헐벗고,굶주린 민중들의

투쟁이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은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미
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민중들이었지만,그들이 품었
던 정의에 대한 신념과 믿음은 억압적인 사회와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발
현되어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줄 뿐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그것
은 그들의 행동을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으로 본다면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비
도덕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그러나 여기에서 바로 그 ‘도덕이 누구의 도덕이
냐’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사회의 복잡하고,현실적으
로 정치적 억압관계에 있는 문제에 있어서 도덕을 정초하는 주체의 기준이 상
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크 이부분 멋있다~~~~


요약하자면,추한 예술과 비도덕적인 행위 앞에서,칸트가 말한 ‘아름다운
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의 상징’이라는 미적 판단의 요구는 그 요구에 응답
할 경우에만 아름다운 것을 도덕적으로 선한 것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많은 이들이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것들 중에는 추
하고,더러우며,하찮은 것들이,또한 당시로서는 사회 규범에 맞지 않는 비도
덕적인 행위들이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경우 우리는 칸트의 요구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2.미적 교육(ÄsthetischeErziehung

 

즉 프랑스혁명의 주체였던 프랑스 국민들은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개인이 되어 혁명을 그르쳤고,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하고 비열한 행동의 광란에 빠져 혁명을 그르쳤
다는 것이다.그래서 쉴러에게는 미적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
이다.

 

>>ㅎㄷㄷ

 

 

 3.미적 가상(ÄsthetischerSche

 

 

“종교의식적 이미지 속에서 작용하는 현상의 일회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눈에 보이는 실증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일회성이나 아니면 그가 만들
어 내는 이미지의 업적의 일회성에 의해 수용자의 의식으로부터 밀려나는 바가 된
다.(…)즉 예술의 세속화와 더불어 종교의식적 가치 대신에 진품성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52)

 

<<일회성과 아우라. 자율성.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
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였다.
복제된 예술작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복제를 겨냥해서 제작되는 예술작품의 복
제품이 되어 가고 있다.53)

 

<<벤야민은 다시 읽어도 천재임

 

 

3.예술의 정치화

 

 

 

 

 

 

- 32 -
1.예술의 양면성
예술에 절대 불가침의 영역을 보장해 주려는 시도가 예술의 자율성 확보에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그러한 시도 자체가 예술의 자율성에 오히려 제약을
가하게 될 것이다.그 불가침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조건이 필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예술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예술은 사회적 관
계의 산물이다.그래서 흔히 ‘순수 예술’,‘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부르는 개념
은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허무하게 느껴지거나,소외된 예술 혹은 생명력을
잃은 예술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왜냐하면 예술작품에서 현실에 대한 어떠
한 관계도 파악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곧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인간 삶
과의 매개적인 요소가 없는 작품은 관객의 흥미를 적극적으로 끌지 못하기 때
문이다.그러한 소외된 예술은 그림자처럼 의미도 없이 떠도는 부랑자와도 같
을 것이다.

 

>>이야 말 멋지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예술은 경험적 현실과 사회적 작용의 연관 관계로
부터 분리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빠져 들어가기도 하는 점에서 양면적
이다”63)라고 평가한다.그가 지적한 이러한 예술의 양면성은 예술을 자율성과
타율성,미학적 성격과 사회적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이중적으로 보도록 요구
한다.왜냐하면 아도르노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섬세한 예술작품도 경험적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일은 없
으며,언제나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의 그 위치에 대해 무의식적이긴 해도 구체적
으로 대립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적 현실에 대해 확정적인 입장을 취하며,예술작품
은 창문 없는 단자로서 그처럼 작품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상상한다.”64)

예술이 양면성을 지녔다는 아도르노의 위와 같은 입장에 따르면,“예술이
자율적이면서도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는 이중적 성격은 자율성의 영역에서

도 부단히 나타난다.”65) 예술에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부여되었다 하더라도
예술은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지
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에 대한 자립을 의미하는 예술의 자율성은 그 나름으로 또한 사회 구조와 연
루된 시민적인 자유 의식의 기능이었다.자유 의식이 형성되기 전에도 실로 예술
은 즉자로서 사회적 지배관계에 대해 혹은 이것이 도덕적인 문제에까지 확장되는
데에 모순 관계를 이루었으나 대자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66)
이에 따르면,작품의 사회적 본질이 작품의 독자적 자율적 존재와 사회에
대한 작품의 관계에 대해 양면적으로 반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작품의 양면성은 자체와 모순을 이루면서 변화해 가는 작품의 모든 현상67)에
서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예술의 자
율성이 사회적․종교적 목적을 위한 유용성의 그늘에서 부정되었다면,현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자율성은 그러한 유용성을 벗어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운 사회에서 또다시 타율적인 상태에 빠지곤 했지만,그래도 예술의 역사발전
의 방향은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고,그것을 향해 달려왔다.그러한 예술의
성격이 예술의 자율성 논의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가능케 해준다.그런 한
에서 예수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마지막ㅋㅋ 예수ㅋㅋ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