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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의 현재성 연구 : 오장환 시를 중심으로 / 전동진 (0.5)

snachild 2014. 7. 20. 13:48

 

서정시의 현재성 연구 : 오장환 시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present of poetry ? Oh, jang-hwan's poems to centers
전동진(Jeon Dong-Jin) (국제어문, Vol.41 No.-, [2007])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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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서정시의 현재를 논증하고자 했다. 시적 현재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객관적 관점이 아니라 주관적 관점을 취해왔다. 이것은 서정
시의 논의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필자는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시적 현
재라고 생각한다. 서정시의 현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구성된다. 하나는 통시
태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태이다. 통시태적 현재는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는 세 가지 과정으로써 드러난다. 실질적으로 필자 강조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시적 현재의 깊이를 더해주는 공시태적 현재이다.
공시태의 현재는 현실과 실재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된다. 현실은 ‘현
전화’를 통해 시적 현재로 녹아든다. 실재는 ‘현존화’를 통해 시적 현재로 솟
아오른다. 무엇보다도, 시적 현재의 핵심은 몸이다. 우리의 몸은 공시적 현재,
통시적 현재, 몸의 현재에 의해 구성된 입체적 현재에서 재구성된다.
이 연구에서, 필자는 시적 현재를 가지고 오장환의 시를 분석함으로써 이
와 같은 가설을 논증하려고 했다.

 

 

서정시에 드러나는 과거의 일은 사건이 아니라 사태다. 사건은 전․
후의 맥락에 의해 의미가 파악된다. 서정시에 습합된 과거의 일들은
연달아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인과성을 상실한 개별적인 사태들이다.
즉 사유의 영역에서 재조합됨으로써 이해되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에
서 무작위로 떠올라 의미 형성의 장에서 대상과 주체와 상호주관적으
로 작용하는 의식작용(noesis)인 것이다.

 

 

오장환의 시에는 세 가지 성격의 ‘현재’가 겹쳐
져 있다. 먼저 화자가 처해 있는 시적 현실과 시적 현재가 일치하는
‘현재’가 있다. 다음으로는 시적 화자가 미래를 선구하는 장으로서의
‘현재’가 있다. 마지막으로 시적 대상과 시적 인식, 시적 주체의 상호
주관성 속에서 구성되는 ‘현재’가 있다. 첫 번째의 ‘현재’에 시적 화자가
드러난 시들은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로 평가를 받았다.4) 그런가 하면
두 번째의 ‘현재’를 통해 시적 화자가 미래를 선구하고 이를 통해 낙관
적인 세계관을 전개할 때 흔히 리얼리즘적 경향의 시로 평가를 받아왔
다.5) 이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넘어 세 번째의 경우에 집중할 때 오장
환은 서정시인으로서의 평가를 온당하게 받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
한다. 이러한 관점을 기반으로 삼은 평가가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이루
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의 지평 확장이 선행되어야 한다.

 

 

2. 현재성의 두 측면
2-1. 현재의 지평

 

문학의 영역, 특히 서정의 영역이 현존재의 거처로써 그 지평을 확
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니체’의 사유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
의 ‘영원회귀’는 서정시의 ‘시적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맥락이 다르
기는 하지만 ‘하이데거’ 역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그 고독을 벗고
본래적 자아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등대의 빛을 서정시를 통해 찾으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정의 불빛에 의지해 세계와 의식 사이를 서정적 자아는 오간다.
그러면서 서정적 자아는 다양한 시향(時向), 시선을 교차한다. 스스로
를 구축하고,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삼중적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다. 이것은 근대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기획이 될 수 있다.
서정 자아는 공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통시적 차원에서도 삼중으로 구
성된다. 이미 있었던 삶, 있게 될 삶, 지금 있는 삶이라는 삼중의 통일
로서 우리의 현재는 구성된다.

서정시는 서정자아의 삼중의 삶을 고스란히 떼어내어 그 흐름과 역
동성을 그대로 살려서 텍스트에 옮겨 놓는다. 이것은 재현의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니 재현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시간은 어떤 것으
로도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중의 삶은 텍스트 안에서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즉 지금 있는 삶은 물론, 이미 있었던 삶, 있게 될 삶까지
우리의 몸 앞에 현전시켜 놓는 것이다. 그 현전화된 시간 속으로 뛰어
들 때 우리는 텍스트와 더불어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시의 현재’는 시간적 측면, 즉 통시적 측면의 것이
었다. 이때 ‘시적 현재’는 서정시에 나타나는 독특한 시간이라는 정도
의 평가를 벗어나기 힘들다. 물론 통시적 측면에서의 시적 현재에 대
한 논의도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본고는 통시적 측면의
고찰과 함께 공시적 측면에서 현재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시적 현재’
는 특이한 시간이 아니라 한층 가치 있는 삶을 일궈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다.

 

 

 

시간을 의식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인식론적 사유는 ‘현재’를 중심에
놓고 시간을 다시 구성한다. 후설의 시간의식에 의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존재론적 지위를 내어주고 시간의 한 변
양, 즉 시간의 양상으로 지위가 떨어진다. 현재를 구성하는 시간의식을
후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현재화 즉 근원인상 .파지.예지. 이것은 1차적 시간 양상을 구성한다.
2) 상기 작용(재현작용): 재현과 예기는 2차적 시간 양상 즉 ‘이전’, ‘이
후’.시간의 거리 등을 구성한다.
3) 상상의 현전화: 상상의식에 있어서의 시간 양상의 구성8)

 

 

 

이 그림과 함께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는 모나드들 또는 영혼들 안에서 현실화되는 하나의 잠재태이고, 또
한 물질 또는 신체들 안에 실재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가능태이다. 실재성
의 문제가 신체들과 관련하여 제기된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누군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가 비록 가상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현상인데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현상이라는 것은 모나드 안에서 지각
된 것이다.13)

13) Gilles Deleuze(2004),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