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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환상적 주체와 팔루스 / 권순정 (0.5)

snachild 2014. 5. 29. 19:30

라캉의 환상적 주체와 팔루스 = Fantastic subject and phallus, in J. Lacan
권순정(Kwon, Sun-Jung) (哲學論叢, Vol.75 No.-, [2014])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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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먼저, 라캉의 주체를 이미지의 주체로 말한다. 주체가 이미지인 것은 그것이
기표적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의 주체는 욕망의 주체이다. 주체는 인간됨의 최
소한의 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적 가치를 포기하고 의미의 주체가 된다.
기표적 삶을 살아가는 이미지의 존재인 주체는 자신의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결여의
존재로서 주체는 자신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욕망한다. 그 욕망의 원인은 그것이
최초의 상실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대상 a이다. 그러나 기표적 삶에 함몰되어 있는 주체
는 최초의 상실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상 a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라캉
은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분열된 주체($)와 대상 a와의 관계를 환상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자신의 실재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실재와 관련 있는 대상 a와의 관계는 환상일 수밖
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인 것은 기표적 삶에 함몰되어 있는 주체가 자신의 완전한 충
족에로 나아가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기 때문이다.
팔루스는 주체가 언어적 세계로 들어올 때, 자신의 실재로부터 양도된 상징계의 욕망
다. 그것 역시 실재를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결여의 기표이다. 라캉은 주체가 팔루스를 어
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다. 따라서 라캉의 성 구분은 생물학적 실재
와는 상관없는 논리적 구분이다. 그는, 상징계의 욕망이 ‘전체’이며 그것을 완벽한 향유라
고 생각하는 것을 ‘남성적인 것’에 배치하고, ‘다른 향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여성적
인 것’에 배치한다. 라캉의 이론에서 상징계는 실재성의 상실, 그리고 무의식의 장을 내재
하고 있기 때문에, 비전체이며 불완전하다. 그에게있어서, 여성적인것은 상징계가 비전체
임을안다는것이다. 팔루스가상징계의 욕망이고그것 또한 비어 있는것으로 존재한다면,
상징계 또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그리고 그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는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팔루스의 순간적 고정점으로 주체가 형성된다하더라도 라캉의 주체는
항시 ‘과정 중’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라캉의 팔루스는 주체를 의미화하는 열린 격자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겠다.

 

 

라캉은 이러한 주체를
두고,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2)고 말한다. 즉
인간은 ‘관계의 장’ 속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때만 인간으로서 인
정받을 수 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렇게 ‘관계’ 속에 빠져있는 주체를 다룬다. 그의
주체는 대면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한다. 주체가 무의
식을 대면하고 있을 때는 무의식의 주체가 되고, 주체가 욕망과 대면하고 있을
때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그의 주체가 여러 국면을 따로따로 가지고 있
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최초의 실재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주체로서의 자격이 부
여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무의식과 욕망은 라캉의 주체가 가진 전제조건이 된다.
수많은 개별주체들이 의식의 이면에 무의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실재를 상실
한 빈 집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주체는 항상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적 결여를 채우려고 한다. 라캉은 “주체의 진실은 이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본성상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대상 속에
있”3)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라캉의 주체는 베일에 감춰진 대상을 통해 자신을
채우려는 빈집과 같으며, 그것은 또한 끝없이 그 빈 곳, 즉 결여를 채우려고 욕
망하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항상 결여가 전제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주체는 타자를 향한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받으려고 한
다. 그런데 이 “대상은 처음에 우리 자신과 같은 타자로서 간주되며 궁극적으로
는 타자의 욕망과 등치된다.”4)

 

 

 

이미 그것의 고유한 실재로부터 소외된 주체는 상징계의 기표로 존재

 

 

여기서 어머니의 젖가슴은 아이
의 욕구를 채워주는 구체적 대상, 즉 팔루스(φ)이다. 상상적 단계에서 아이는 이
젖가슴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라캉은 이
단계의 욕망의 기표를 상상적 팔루스(φ)라고 한다. 그러나 상징적 단계로 들어서
면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는 팔루스는 거세당한다. 따라서 “주체는 엄밀히 말해
거세라는 ‘마이너스 파이(-φ)’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어떤 형태 속에서 무화된 주
체”29)이다. 이는 육체적 실재가 욕망하는 것으로서 팔루스(φ)의 상실이다. 상징
계로 들어선 주체에게 욕구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은 거세당하고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또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데, 그 요구의 발단이 거세 이전에 아이
에게 충족감을 주었던 그것, 즉 ‘대상 a’이다. 생물학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아이
의 요구는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로부터 오는 완전한 만족이나 기쁨 등은 상징적
질서에서는 상실된다.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는 의미논리의 주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