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토스와 로고스 : 현대의 신화 읽기 = Mythos and Logos
- 송병구 (종교와 문화, Vol.- No.9, [2003])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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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화에 대한 재론
대부분의 민족들은 발전의 어느 시기에 이르렀을 때 불가사의한 사건을 담은 설화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어느 정도는 그것을 사실로 믿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이야기들은 초자연적인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후에 신화와 종교로 분류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해석을 모색하는 과정이었고, 인간의 이성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일관된 체계를 갖기 시작했다. 이 해석의 중심에는 늘 주인공―대부분 사람과 신의 협연―이 있기 마련으로, 그 주인공의 사적(事跡)에 얽힌 이야기들이 곧 당대의 세계 이해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우와 말 진짜 잘하신다...
그래서 신화란 자연이나 인간 세계의 경이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신들이나 영웅들의 활동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신화 속에는 당대의 사회·문화를 배경으로 당대인들의 ‘삶의 현장’이 전개됨과 아울러, 제기된 문제에 대해 그 시대적 합리성을 토대로 한 해답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에도 인간의 지성이 참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사용된 합리성은 다분히 은유와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되었기에, 단순히 지성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의 규범을 부여하는 작업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신화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이해의 패러다임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신들은 결코 인간과 이질적이거나 인간을 초월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신들은 언제나 인간적 차원에서 접근되어진 어떤 위대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신화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이러한 신들과 인간 영웅들과의 협연, 곧 ‘신과 인간의 나선형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역사 기록의 색채를 띠고 도시나 가문의 고귀한 유래를 나타내기도 하고, 종교적 신앙이나 제사 의식을 권위 있게 만들고 그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신화를 일컫는 그리스어 ‘뮈토스’란 ‘사람의 이야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 사람들의 그 시대의 이야기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극의 소재나 희극의 줄거리는 물론 아이소포스에 등장하는 주제도 뮈토스가 된다. 그런데 이 뮈토스는 ‘로고스’에 대립하는 어휘이다. 그것은 공상과 이성으로, 그리고 이야기하는 말과 논증하는 말이 대립한다. 그래서 뮈토스와 로고스는 말의 양면을 이루고 있으며, 양자 다 같이 정신 생활의 기본적 기능이다. 논증으로서의 로고스는 설득을 목표로 하며 듣는 자의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로고스는 올바르고 논리적일 경우에는 진실로 판명되지만 오류가 드러날 경우에는 허위가 된다. 그러나 뮈토스는 오로지 뮈토스 외에 아무 목적도 없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의 자유다. 그것을 믿는 이유가 자신의 감성을 자극하여서든, 이성을 자극하여서든, 아니면 아름답거나 혹은 사실처럼 생각되든, 아니면 그저 믿어보고 싶어서 믿는 이야기일 뿐이다.
>>뮈토스 : 공상 / 이야기하는 말
로고스 : 이성 / 논증하는 말
그러고 보면 뮈토스는 인간사의 비합리적인 것을 그 주위에 끌어 모으는 특성이 있어서, 성질상 창조적 기능으로 볼 때 예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술적인 특성이 신화로 하여금 다양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도록 한 주된 원인이다. 이러한 신화의 예술적인 특징과 그 영향력을 통해 신화는 정신적 활동 영역에까지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도 인간의 정신 활동을 토대로 한 사유활동이라는 점에서 예외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과학은 주로 로고스적인 사유의 틀 안에 조직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은 뮈토스에 대응되는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뮈토스가 전해주는 자연은 인간과 인간의 ‘삶의 토대’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우선하였기에, 그들의 자연은 그들과 맞서기보다는 동질적 존재 즉 의인화되었던 것이다.
>>과학과는 다른 자연에 대한 이해
반면 과학은 자연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화와 과학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의 표현 양식에 대한 차이, 곧 대상에 대한 태도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차이가 자연 과학의 탄생 이후 약 2500년이 흐르는 동안, 양자는 마치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전혀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 주머니처럼 말이다.
과학의 시대라 하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신화를 말하고 있다. 신화에 대한 긍·부정의 태도를 떠나 신화는 다양한 시각에서 언제나 거론되고 있다. 즉 신화는 과학의 날카로운 면도날의 예리함에 의해서도 갈라지지도, 손상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우리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신화의 이러한 끈질긴 생명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신화는 과학 시대 이후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당대의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으면서 포기되기를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신화는 남았고, 당대의 합리성은 그를 뒤이은 합리성으로부터 비판되고 거부되면서 사라져 가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합리성의 한계를 보게 된다. 합리성은 그 경계와 토대가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사실이다.1) 그것이 아니면 합리성보다 비합리성이 때로는 더욱 강한 생명력, 더 넓고 깊은 영역과 토대 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신화는 단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들은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인간의 삶이, 인간의 생각이, 인간의 바람이, 인간의 욕망이 분출된 곳이 신화이다. 즉 인간의 전 인격의 드러남이 신화이다.
그 결과 인간의 최초의 아름다운 사유의 업적인 뮈토스는 로고스를 갖지 못한, 초췌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화는 허구성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총체 개념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신화의 힘의 본질은 의식에 있기보다는 전의식적(前意識的)이고 초의식적(超意識的)인 내면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흐르는 이 초의식은 인위적인 사유의 한계를 넘어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와 대상의 의미를 찾아 자유와 상상의 세계 속으로 거침없이 물어 들어가는 힘이다. 그래서 이러한 힘을 지닌 신화는 본질상 철학의 딱딱한 논리적 한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고, 또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하는, 신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신’을 탄생시켰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은 상상의 ‘중추’이자 사유의 ‘터’가 된다. 그래서 철학은 신으로 압축된 자유로운 사유의 체계이자 광활하고도 측정 불가능한 신화적 세계를 보면 혼돈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5)
김내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교보문고, 1996, 29-30쪽 참조.
>> 우와... 진짜 글 잘 쓰신다..
Ⅲ. 과학 시대의 신화 읽기
1. 초미시와 초거시 속의 신화
논자는 현대 사회 역시 여전히 신화적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의 포크레인이 할퀴고 간 흙더미 속에서도 아직 ‘말―로고스’로 드러내어지지 않은 숱한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야기들은 현대 문명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적 구조에서 새로운 해석의 틀 안으로 옮겨져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공간 속에 흐르는 다양한 이야기―뮈토스―들이 로고스화 된다는 말이다.
Ⅳ. 신화(뮈토스)의 언어와 철학(로고스)의 언어의 상관관계
신화에서 사용된 언어들은 거기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논리적인 것이 표현되고 있지 않다고 해도, 또한 화자가 반드시 논리적인 연관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논리적인 연관을 가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논리적 요소는 고유한 언어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말 가운데 포함될 수 있다. 논리적인 것을 표시하는 언어적인 수단은 비교적 뮈토스 시대의 후기에 들어서 발전하게 되었다. 원초적인 상태에는 논리적인 것이 ‘암묵적으로만’ 언어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의미 깊게 맥락을 좇아 말하는 능력은 이른바 ‘논리적인 사고’의 발달과 더불어 이 세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Ⅴ. 결론: 뮈토스와 로고스 ―인간의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 앎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느냐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보다는 더 많이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역사는 전시대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비판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쌓여진 인간의 지식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시대이건 간에 당대의 인간은 당대의 패러다임 속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관찰자의 태도는 관찰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라는 언명을 통해 패러다임의 한계 내에서의 과학임을 비교적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이 제 아무리 수십 번의 변화를 겪어 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삶이라는 패러다임’이었고·이고·일 것이고, ‘자연은 여전히 자연’이었고·이고·일 것임을 직시한다면, 앎이 삶의 방법을 바꾸어 놓을 수는 있어도 ‘삶 자체’는 바꾸어 놓을 수 없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논자는 본 논문에서 초미시의 세계와 초거시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상황을 논함으로써, 초미시이든 초거시이든 우리의 실제적인 의식의 범주에서 이미 벗어난 세계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과학자들에게는 이들의 세계는 수학적 연산(operate) 속에서 취급(handling) 가능한 대상이라고 말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안경’을 벗어버린다면, 초미시나 초거시의 세계는 금방 불확실한 세계가 되지 않는가?.22) 그래서 과학자들은 언제나 이 안경을 닦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의 안경 렌즈가 닳는다거나 흠집이 많이 생기거나, 또 자신의 시력에 맞지 않을 때에는 새로운 렌즈로 교환하듯이, 이들은 늘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개발하고 도입해야만 한다. 만일 새로운 수학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세계는 신화로 전락될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과학과 철학이 언제나 늘 신화로의 회귀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뮈토스와 로고스의 공동의 이야기 대상인 자연이란, St. Augustinus가 말하듯, 지상적 삶 속에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되어야만 하는 두 표현 양식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논자의 소박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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