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이거? 뭔가 디게 재밌겠는데!?!?
롬바흐의 “구조존재론”은 “존재 자체”를 관계론적이고 역동적인
“사건”으로 사유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생성
(Genese)”의 존재론이다. 이러한 구조존재론 또는 생성론의 핵심에 본고
는 “창조성” 모티프를 통해 접근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구조존재론의 매
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창조성의 존재론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흔히 오해되고 있는 창조는 본래
“무(無)”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롬바흐는 이
러한 창조가 본질적으로 “공창조적(konkreativ)”인 것임을 강조한다. 창조
적 “생성”은 어떤 창조적인 개별 주체에 의해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야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나와 사태, 인간과 자연 등 그 “구조의
생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
서 이러한 공창조적 과정의 주체는 더 이상 “나”나 “너” 또는 “사태”가 아니
다. 그것은 그들의 생동적인 관계 전체 또는 그 생성과정 자체이다.
롬바흐의 구조존재론은 이러한 구조생성의 근본특성들을 밝혀보고자 하
는 시도이다
롬바흐의 철학에는 “서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공속”하고 “상보적”인
상이한 세 단초가 있다. 그것은 “구조존재론”과 “그림철학”, 그리고 “철
학적 헤르메틱”이다.1)
>>헤르메틱이 뭐임?
?실체․체
계․구조?와 ?구조존재론?은 구조존재론에 관한 그의 대표작이다. 그
후속작으로는 특히 ?구조인간학?(1987, 21993)과 ?사회적 삶의 현상
학?(1994)8), 그리고 ?근원?(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조성” 모티프를 통해 구조존재론의 핵심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구조존재론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 창
조적인 것의 존재론, 창조성의 존재론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9)
후기 하이데거의 “사물(Ding)” 현상학에 의하면 사물은 본래 세계를
모으고 밝히는 “세계-사물”이며 세계는 사물 안에 자리 잡는 “사물-세
계”이다.18) 사물과 세계의 근원적 관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러한 통
찰을 수용하는 롬바흐는 한 세계 또는 차원의 창조는 “어떤 것
(Sache, 사태)”19)과 관계되어서만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그 “어떤 것”이라기보다
는 그것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세계” 또는 “차원(Dimension)”이라는
것을 그는 동시에 강조한다.20) 이는 창조성을 단지 사물이나 사물적
인 것 — 예컨대 새로운 물건의 발명 — 에서만 찾는 대부분의
<<뭔가 풍부한 예시를 통해 알게 쉽게 쓴 듯한... 느낌적인 는낌
바를라흐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형성차원”,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러시아
의 한 평원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깨달음에 이
른다. 그 깨달음은 더 없는 기쁨과 함께 열병처럼 그를 덮치고, 그는
물릴 줄 모르는 식욕으로 도시와 초원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킨다.
러시아의 한 풍경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이제 그의 “형성원리”가 된
다.24) 자신의 세계를 발견한 바를라흐의 이후의 작품들은 이제 다양
한 형상을 통해 ‘동일한’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 그들이 진정한 작품인 한 ― 한번 획득되고 확보된 그의 변하지 않
는 ‘아이디어’를 다양한 형상들을 통해 단순히 표현하고 찍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과 그의 세계는 매 작품마다 새로이 거듭나야만
한다.25) 그때그때 무(無)로부터(!) 구체적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그것이 단지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창조”이다.26) 이렇게 볼 때 우
리는 한 예술가의 작품들이 각기 비교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나름대
로의 일관성을 보이는 것, 다른 예술가의 작품들과는 다른 독특한 스타일 또는 분위기를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차원”이 본질적이라는 롬바흐의 언급을 이러한 맥락에서
도 이해할 수 있다.
>>오오..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 한 적 있는데.. 오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4. 공-창조성
그런데 롬바흐는 창조성
또는 창의성을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의 계발되어야 할 재능으로만 생각
하는 한, 그것은 도리어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개인적 주체성 속으로 자아 넣는 것
(Einspinnu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0) 하지만 이러한 감금은 진
정한 창조성과 상반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것(Sache, 사태)”, 예를 들어 한 “예술작품”을
통해 “한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한 새로운 세계”31)가 열리는 창조적 사
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한 새로운 차원의 개현을 (망아적으로)
경험하는 예컨대 예술가나 감상자는, 적어도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사
람이 된다. 즉 한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이에 상응하는 한 새로운 인
간, “한 새로운 자기(Selbst)”의 탄생을 수반한다.32)
소위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이라는 것은 본래 이런
식으로만 가능하다고 롬바흐는 본다. 즉 참다운 자아나 자기는, 사람
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미리 주어져 있거나 선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생기하는 창조적
과정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형성해야 한다.33) 자기 자신의 그림을 미
리 그려 놓고 그것의 실현을 꾀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으나 그것은 사실 모든 기대와 선취를 넘어서는 진정으로 창조적
인 자기 자신의 발견과 형성을 가로막는 길이기도 하다.34)
>>오마이갓.... 말이 안나와 넘 좋아서...........
>>33) 롬바흐의 자아론(自我論)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 롬바흐, ..살아있는 구조.., 전
동진 옮김, 서광사, 2004, 145-183쪽.
이거 꼭 빌릴 것 꼭꼭꼭꼭곡곡!!!!!!!!!!!!!!!!11
<<<
이것도 관련 도서인듯 이것도 빌릴 것
이 인용문에서 롬바흐는 예술작품의 “자가생성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창조적 능력을 지닌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작품을 만들어내
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자가생성적인 것, 즉 스스로 출현하는 것
이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의 이러한 생기사건에서 단지 산파 역할, “목
자”(하이데거)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를 일방
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존재의 “보냄(Schickung)” 또는 “존재역
운(Geschick)”이라는 하이데거의 (모든 것을 몰아세우는 기술문명 비
판적)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보다 롬바흐는 창조적 생기사건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인간을 말하자면 ‘함께 창조
하는 자’로 본다. 즉 예술가만 예술작품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위 인용문에서 “그 역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재
능과 능력”을 가진 예술가가 “그가 표상하는 형상을 재료 속으로 가져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예술가와 예술작
품은 창조적 과정 속에서 더불어 탄생한다. 예술작품의 탄생은 또한
그 작품세계의 탄생을 의미하기에 결국 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이
작품의 고유한 세계는 말하자면 서로를 낳는 것이다. 이러한 상생(相
生)의 생기사건을 롬바흐는 “공창조성(共創造性, Konkreativitat)”이
라고 칭한다.
“인간은 그의 ‘사태(Sache)’와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서 출현한다. ― 이
것이 우리가 ‘공창조성’이라는 [낱말] 아래 이해하는 것이다. ‘공(共,
Con)’은 인간과 차원에 결부된다.”36)
“공창조성”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롬바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창
조적 “생성”이란 어떤 창조적인 개별 주체에 의해 일방적이고 자의적으
로 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나와 재료, 나와 사태
(Sache), 인간과 상황, 인간과 자연, 인간과 현실 등 그 “구조의 생성
(Strukturgenese)”에 참여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응하고 서로 어우
러지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창조란 독불장군식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창조는
타자와의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열린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창조란 본질적으로 공창조적이다.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이 “공(共, 함
께)”에 달려있는 것이다. 오늘날 보편화와 상대화, 국제화와 지역화의
긴장관계 속에서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이한 종교간
의 대화나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만남도 단순한 관용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 속에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공
창조성을 지향할 때 비로소 충돌의 관계를 진정으로 벗어나 생산적인
상생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공창조적 과정의 진정한 주체는 더 이상 “나”나 “너” 또는 “사태”가
아니다. 자신의 조건들을 스스로 산출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공창조적 생기사건, 즉 “자가생성적”인 그 과정의 주체를 롬바흐는 “es
geht(그것은 그럭저럭 되고 있다)”라는 일상적 어법에 주목하며 “그것
(es)”이라 칭한다. 그는 일상어의 차원에서는 “es geht”라는 관용어에
서 공창조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38) “그것”은 공
창조적 생기사건에 관련된 모든 개별 계기들을 하나로 결합하고 서로
를 지지하게 하는 그 전체 구조, 그 구조의 생성 자체,39) 또는 그 구
조의 말하자면 “삶과 행동과 반응의 원리”로서의 “내적 중심”을 가리킨
다.40)
보통은 그저 “그럭저럭 되고 있는” 이 “그것”이 “es gelingt(그것은
성공적으로 되고 있다)”와 “es glückt(그것은 의외로 성공적으로 되고
있다)”의 차원으로까지 상승하면, 즉 공창조적인 한 과정이 “저절로
(von selbst, 스스로)”의 단계로 제대로 접어들면, 그것은 그 구성원
들을 “휩쓸어 가고 잡아채” 간다.41) 이 때 그 “헤르메스적” 과정의 참
여자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고양되고 일체가 된다. 이 “일
체성(Idemität)” 속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황홀한 필연성의 순간이
바로 진정한 자유의 순간이다. 공창조적 생성 과정에서 필연성과 자유
는 하나가 된다. 이 때 우리는 공창조적 과정 자체와, 즉 “그것(es)”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전체 구조의 한 대표자”가 되고 전체가 전체로서 우리를 통
해 작용한다. 우리는 전체의 입이 되고 손발이 된다. 이러한 일체성
속에서 우리는 결국 만물의 ‘절대적’ 근원 자체와, 즉 롬바흐가 “우주생
명(All-Leben)”이라고도 부르는 “그것(Es)”과도 하나가 된다.
>>아 진짜 졸라 감동적이야.... 아 진짜 뭐냐... 롬바흐 짱.... 나 롬바흐한테 반한 듯 지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러한 “공창조성의 존재론”은 소위 예술작품이나 인간의 활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전체와 관련된다. 이 새로운 “보편
존재론”, “모든 현실의 기초존재론”을 롬바흐는 “구조존재론”이라 부른
다.42) 예술(작품)을 구조사상의 가장 적절한 모델로 간주하는 구조존
재론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구조이고 예술(작품)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함께 창조하는 자’로 파악된다. 공창조성은 “현
실의 핵심적(innerst) 의미”이다.43)
40) 참조. H. 롬바흐, ?살아있는 구조?, 147쪽.
41) 참조. H. 롬바흐,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86쪽.
42) H. Rombach, ?근원?, 40, 43쪽.
“무로부터의 창조”
그것은 구조
존재론에서 “창조”란 본질적으로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점이다.56) 이
제 “무로부터의 창조”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단 하나뿐인 세계’
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를 (끊임없는) 무화를 통해 근원적으로 “재구성
(Rekonstitution)”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존재론?에서 롬바흐는 구조사상을 삼단계로, 즉 “구조의 구성틀
(Strukturverfassung)”, “구조의 역동성(Strukturdynamik)”,
“구조의 생성(Strukturgenese)” 순으로 펼쳐 보인다. 하지만 “구조”
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세 번째 단계, 즉 “구조생성”의 단계에서이
고, 앞의 두 단계는 이 가장 근본적인 세 번째 단계의 “변양
(Abwandlungen)”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구조존재론은 현실의 존재론적 근본특성을 “구성틀”이나 “역
동성”이 아니라 “생성”에서 찾는다. 구조존재론은 근본적으로 생성의
존재론이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 볼 때 “구성틀”과 “역동성”은 엄밀히
말하자면 생성의 “오해”에 불과하다.77)
다시 말해 “구조”는 근원적인 생성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성
과정의 정태적인 “구성틀”에 가까운 용어이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생성
하는 공창조적 사건을 오해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낱말로 지칭했던
롬바흐의 시도는 ― 하이데거의 “사건(Ereignis)”이라는 명칭만큼이
나, 아니 그보다 더 ― 실패작인 것으로 보인다.
>>흐어엌 따가운 비판...
“구조존재론”에서 “존재론”이라는 용어도 문제이다. 물론 여기서 “존
재론”이라는 낱말 아래 롬바흐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전통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존재(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하이데거에게서처럼 그것이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구조
존재론”에서 “존재”는 공창조적인 “출현(Hervorgang)” 사건을 가리킨
다.81) 그리고 이는 바로 전통 “존재론”의 극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래 “존재”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공창조적 생기사건, 즉 생성의 시작조건과 전개방식, 종료형태 등을
논하는 롬바흐의 철학적 시도는 “구조존재론”이 아니라 “생성론
(Geneseologie)”이라 불리는 것이 사태에 보다 적합할 것으로 보인
다.82)
전동진, ..창조적 존재와 초연한 인간.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구조.., 서광
사, 2002.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창의성의 즐거움..(Creativity. Flow and the psychology
of discovery and invention), 노혜숙 옮김, 북로드, 2003(원서는 1996).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Creating Minds. An anatomy of creativity
seen through the lives of Freud, Einstein, Picasso, Stravinsky, Eliot,
Graham and Gandhi), 임재서 옮김, 북스넛, 2004(원서는 1993).
H. 롬바흐, ..살아있는 구조.., 전동진 옮김, 서광사, 2004.
H. 롬바흐,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전동진 옮김, 서광사, 2001.
H. 롬바흐, ..철학의 현재.., 전동진 옮김, 서광사, 2001.
Rombach, H., Strukturanthropologie. “Der menschliche Mensch”,
Freiburg/Munchen: Alber, 1987.(..구조인간학..)
Rombach, H., Strukturontologie. Eine Phanomenologie der Freiheit,
Freiburg/Munchen: Alber, 1971.(..구조존재론..)
>>꺄~~ 이건 영어가 아닌데~~ 영어 책이라도 있으려나...
<<<전동진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덕분에 롬바흐를 알았어요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엉엉엉 헤르메스 어쩌구 역서도 이분이 번역하셨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님 짱짱맨ㅠㅠㅠ 롬바흐 짱짱맨ㅠㅠㅠㅠ 감사해요ㅠㅠㅠ
'from논to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바타 기획을 위한 디지털 공간의 페르소나 / 이동은 (0) | 2013.11.26 |
---|---|
'구조'의 형상학 : 하인리히 롬바흐의 '구조존재론'적 사유체험의 '현재'를 위하여 / 양국현 (0) | 2013.11.26 |
사이버 공간의 대리자아 아바타의 역할 유형분석 / 박성희 (90/100) (0) | 2013.11.24 |
캐릭터 중심의 RPG 스토리텔링 구조 분석 / 김미진, 윤선정 (0) | 2013.11.24 |
MMORPG 캐릭터의 아이러니 연구 / 류철균, 안보라 (0) | 2013.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