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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판타지성과 하위주체 발화 양상 / 고선희

snachild 2013. 10. 25. 14:07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판타지성과 하위주체 발화 양상 = A study on the aspects of subaltern's speech and fantastic features in TV Drama <a deep-rooted trees>
고선희 (국제어문, Vol.55 No.-, [2012])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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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ㅋ 드라마 연구다ㅋ 최근 텍스트당

 

 

1. 서론
2. ‘하위주체’와 텔레비전 역사드라마
3. 하위주체의 존재성과 ‘글자방’의 판타지성
4.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5. 결론

 

 

[국문초록]
본고는 텔레비전 역사드라마가 역사 인식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콘텐츠
라는 관점에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의 하층민 ‘채윤’과 ‘소이’의 재현 양상을 분
석한 글이다. 이 드라마는 그간의 역사 기록에서 지워지고 잊혀져온 하위주체가 한글창제
와 같은 중요한 역사의 동인이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의 목숨을 노려 궁궐
에 잠입했던 채윤과 어린 시절의 비극적 사건 이후 실어증을 앓는 나인 소이는, 세종의 한
글창제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들이다. 문자와 언어와 권력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처음엔 매우 달랐으며 따라서 그들은 강하게 부딪힌다. 그러나 논쟁과 대화의 결
과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훈민정음 반포를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정치와 권력과 소통의
문제는 기존의 역사드라마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져 왔지만, 노비 출신 말단 무관과 무수

리가 임금과 사적으로 맞대면하여 언어와 문자, 정치와 책임에 대해 논쟁하기까지 하는
이러한 드라마는 한국 텔레비전 사상 전례를 찾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탈식민 담론에서의 ‘하위주체’ 개념을 확장 전유하여 말단 무관 ‘채윤’과 무
수리 ‘소이’를 하위주체로 명명하고, 그들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세종 ‘이도’와 관계 맺
는 방식과 소통의 양상을 분석하였다. 이들의 관계 맺음과 소통의 양상은 역사와 상식을
뛰어넘은 것으로서 다분히 판타지적이다. 따라서 그러한 판타지성을 구현하는 구체적 양
상과 그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채윤과 소이는 임금과 맞대면하여 스스로의
입장과 생각 그리고 욕망을 주체적으로 발화하고 있다. 신분과 지위가 현격히 다른 그들
이 집현전 내부의 비밀 공간 ‘글자방’에서 자주 사적으로 만나 문자와 언어, 권력과 책임
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스피박의 저 유명한 물음을 상기시킨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지배 언어를 동원한 재현 체계의 한계로 인해 하위주체의 말하기란 본질적으
로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스피박은 그러한 물음을 통해 강조한 바 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의 하위주체 채윤과 소이의 재현 양상은 그러므로 보다 주목되는 바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 입장과 생각을 당당하게 말함으로써, 그간 역사에서 지워지고 잊혀져온 하위주체의 목
소리에 새삼 귀 기울이게 한다. 그들이 임금 세종과 소통하며 맺는 관계의 판타지성은 하
위주체의 역사적 존재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서사전략이었던 것이
다. 본질적으로 허구의 서사에 그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이와 같은 방식으
로 하위주체 역사의 복원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역사 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주제어] 하위주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역사드라마, 텔레비전 서사, 판타지성, 가야트리 스피박, 윤
리적 개별성, 세종대왕, 훈민정음, 한글

 

>>우와 뿌나가 이런 내용이었어????? 완전 재밌었겠다

>>"탈식민 담론에서의 ‘하위주체’ 개념을 확장 전유하여" ---나도 이래야 함

>>그나저나 국문초록 잘 쓰신듯.. 우왕 굳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러한 세종의 정치 철학이 비
단 ‘경연(經筵)’을 통한 지식인 지도층과의 논쟁 뿐 아니라 하층민 백성들
과의 소통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음을, 한글창제 과정의 우
여곡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글을 알게 되면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 소통
도 원활해질 것이며 백성들 스스로도 삶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습득하여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세종 ‘이도(李祹)’의 생각

이었다는 것이다.

 

>>아... 세종 대왕님 짱짱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노비 출신의 말단 무관인 ‘채윤’은 엄청난 비밀
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비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
아넣은 장본인이 임금 세종이라 믿고 있으며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과거
를 속인 채 궁궐에 들어온 인물이다. 친위대의 말단 무관 ‘겸사복’으로 임금
에게 접근할 기회만 노리던 채윤에게 아이러니컬하게도 집현전 학사 피살
사건의 수사가 맡겨지면서, 그는 세종과 그 측근들의 비밀에 빠르게 접근
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이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채윤은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글자는 알아서 무엇 하겠냐” 반문하며, “하
루하루 생존에 급급한 백성에겐 글을 아는 게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요새는 이렇게 작은 인물들. 왕이나 신하나 권력 짱짱맨이 아니라 이런 주변부, 노예, 평범한 사람, 천민, 일반 민중 이런 걸 다뤄야 하는 듯

    뭔가 인기작에서 볼 수 있는?

    뭐 지금이 상위 모방 신화의 시대는 아니니까

 

 

드라마는 추리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주인공 세종을 중심으로 한 영
웅 서사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주목
되는 건 오히려 강채윤이란 인물이다. 주인공이었던 채윤은 드라마로 각색

되면서 세종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선 시종
관찰자적 위치에 머무르고 있던 그가 임금의 적대자에서 동조자로 변화해
가는 역동적인 캐릭터로 변형되어 오히려 그 존재감이 강화되었다. 채윤은
최고 지도자 세종은 물론 지식인 지도층 사대부들과도 대척점에 서는 인
물, 즉 피지배자인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표상된다. 즉 드라마 <뿌리 깊
은 나무>는 지식인 사대부들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임금인 세종과 맞서는
채윤을 통해, 최고 통치자와 백성 간의 관계를 매우 역동적인 양상으로 재
현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왕권과 사대부권의 대립만이 아
닌 보다 더 근본적인 역사의 동인으로 백성의 존재를 전면화하고 있는 것
이다.10)

 

>>크~ 좋은 드라마일세

 

 

요컨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하위계층의
욕망과 그들의 발화(불)가능성을 보여주는 텍스트이며, 이는 기존의 역사
에서 지워지거나 주변화 되어온 인물 혹은 집단의 역사11)에 대한 복원의 시도일 수 있다.

 

>>어하? 이 발화(불)가능성은 저번에 종종 봤던 것인데? 역시 하위주체

 

 

 

이러한 장면들은 이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저 유명한 물음을
상기시킨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서발턴’12)은 그람시가 옥중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
를 대체해 사용한 용어이며13), 이후 탈식민 연구자 구하가 이를 차용해 개
념화한 것이다. 인도 서발턴 연구 그룹을 선도한 구하는 인도의 식민 역사
에 ‘엘리트의 정치 영역’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식민 권력과 토착 권력
에 대항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행위/의식을 드러낸 ‘민중의 정치 영역’

존재했다고 보고, ‘서발턴으로서의 민중’의 정치 영역에서의 역사적 현존
을 입증했다.14)

 

 

 

그녀는 서구의 지성인
들이 억압받는 집단을 위해 말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들의 목
소리를 죽이는 데 공모하는 것 아니냐며, 보편적인 정치투쟁의 언어가 권
리를 박탈당한 집단의 삶에 잠재적으로 오히려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힐
수도 있음을16) 지적하였다.

 

>>우와 이거 진짜 소름 돋는 지적이다

    ㅇㅁㅇ

 

 

특정 로컬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 이론의 단계까지 끌어올린 서발턴 연구
집단의 이러한 성과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일반
적으로 ‘서발턴’은 ‘하위주체’로 번역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대개념화 되
어 사용되고 있다.17)

 

 17) 김영선, 「서발턴 연구의 지식생산과 확산」, ?시대와 철학? 22-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1. 36쪽.

 

>>대개념화 되었다니 이를 참고하세열

 

 

 

탈식민 담론에서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
제에서의 소외와 배제의 문제를 논할 때에도 자주 호명되며, 이때의 ‘하위
주체’는 ‘주변화 되거나 소외된 존재 혹은 집단’ ‘이름 없는 자’ ‘인식되지 않는 자’ 등을 의미
한다.

 

>>앗!! 내가 찾던 게 이런 거였어!!!!!!!

 

 

 

따라서 노비 출신 채윤과 소이가 극 중에서 드러
내는 목소리와 행위성이 지니는 의미는 ‘하위주체’와 그들의 ‘발화(불)가능
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해독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하위
주체 발화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스피박은 역설적으로 역사적 사
회적 존재로서의 하위주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즉 언어
와 그 재현 체계가 지배계급의 지배 담론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상태에서
는 하위주체가 말한다 해도 여전히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음
18)을 지적
함으로서, 우리가 적어도 그들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말에 귀 기울일 새
로운 방식을 찾고자 노력해야 함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다 열린 시
각에서 본다면 이름 없고, 인식되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는 ‘하위주체’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닐 수도 있으며, 드라마 <뿌
리 깊은 나무>는 채윤과 소이를 통해 적어도 그 의미에 주목하게 하는 텍
스트일 수 있다.

 

 

>>우와 우와

 

 

텔레비전 역사드라마는 그런 의미에서 보다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식인 지배층의 역사요 승자의 역사인 기록된 역사에서 주변화 되었거나
아예 지워지고 은폐된 자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또 다른 시도가 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구현하는 역사에 대한 역사가들의 비판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은 대중의 역사소비가 역사가가 쓴

논문이나 저서가 아닌 TV에서 방영되는 사극이나 영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19) 이러한 현실을 간과하지 않고 텔레비전 역사드라마의
재현 특성에 주목해 본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과거의 무엇을 어떻게 바라
보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
다. 역사의 영화화를 적극 권장하는 라크 (R, J, Raack)는 영화가 ‘역사상 인
물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목격하고 이해하고 살았는가를 전달하는 감정
이입식 재현’을 제시하는 능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20), 로젠스톤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를 ‘정서적인 것, 개인적인 것,
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21) 이는 유사한 영상 미디어로 역사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역사드라마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같은 서사물
인 소설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소설이 화자의 시점, 문체,
인물의 대화체 등에 의거하는 반면, 텔레비전드라마는 카메라의 움직임,
미장센, 편집 조명 등 시각적 요소들에 의존하며, 이러한 재현 방식의 차이
가 플롯 등 텍스트 내적 요소들은 물론 수용자의 심미적 반응 결정에 직접
적 영향을 행사하기도 한다.22) 활자로 재현되는 소설과는 달리 텔레비전
드라마는 시청각을 동원한 다양한 재현을 통해 보다 강하게 각인시키며 그
효과 또한 오래 지속되게 된다.23)

 

 

>>헐ㅋㅋ 뿌나는 김적절한 텍스트였던듯

  텍스트 선정도 짱이시네여

>>학자들의 말은 좋은데

   각주 23은 글쎄.....  (진민국, 「임순례 감독의 현실 재현 체계연구」, 동국대 석사논문. 2008. 8쪽.)

   다양한 재현과 시청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보다 영화가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각인하고 효과 지속시키는 데 반드시 우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님

   이걸 그냥 매체 차이로 단순화시키는 게 당황스럽네;;;;; 반드시 다양한 감각을 통해 재현해야만 강하게 각인되고 효과가 좋다고???? 뭔 솔

  

 

 

<뿌리 깊은 나무>의 하위주체 채윤과 소이가 그들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역사적 존재성을
드러내는 행위를 할 때 그것은 자주 ‘글자방’에서의 장면화로 제시되고 있
다. 즉 이들의 재현 양상은 자주 ‘판타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에서의 하위주체 채윤과 소이가 세종
이도와 개인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장면들은, 스피박이 언급한 바 ‘윤리
적 개별성’에 따른 ‘내밀한 만남’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스피박은 하위

주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내밀한 만남 secret encounter’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인과 개인의 만남을 책임과
의무 그리고 윤리에 바탕을 둔 ‘윤리적 개별성 ethical singularity’이라 명
명했다.29

 

>>으음 이 윤리적 개별성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방향이랑 좀 다른 듯

 

 

 

텔레비전 역사드라
마는 시각적 이미지와 서사가 함께 제시되는 방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보다 정서적인 것, 개인적인 것, 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미디어이기 때문이
며,

 

>>어라 이 말은 좀 공감이 가는데? 그러니까 극적 제시/재현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은 정서적인 것, 개인적인 것, 극적인 것을 만드는 게 덜하다고는 생각 안해;ㅅ;

 

 

 

그럼
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전체의 서사 속에서 명백히 하위주체의 자리에 머물
고 있으며, 그들의 발화 또한 결과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수렴될 뿐일
경우가 존재한다.

 

 

소설이 사건 서술과 대상묘사에 치중하는 반면, 영상언어
로 표현되는 드라마는 사건의 직접적인 제시형태인 ‘보여주기’로 대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뭔 솔...;; 소설에도 미메시스가 있거든여;;;; 소설에 디에게시스만 있는 거 아님. 직접 제시 짱 많음 소설에도;;;

    그냥 소설 얘기를 안하고 드라마이 짱짱짱짱짱이다 라는 말만 하면 안됨? 왜 자꾸 소설이랑 비교하려는지 모르겠네;;;

 

 

소설에서와는 달리 영상 서사물에서는 ‘카메라’라는 전지적 시선
의 서술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에서와 달
리 어떤 인격을 지니지 못함으로 인해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적 입
장은 명확히 파악되기 힘들다.

 

>>Aㅏ............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설과의 비교 드립;;;

    드라마 논문인데 왜 자꾸 소설 까요 이게 드라마랑 소설의 매체 차이 전달 효과 이런 거 하는 논문도 아니고 하위주체 발화 양상 보여주는 건데

   하위 주체 발화양상 나타나는 소설도 있는뎅... 왜 소설 까요

 

 

 

카메라서술자는 그러므로 ‘분열적’이다. 그리고 그 분열성은 서로 다른 다
양한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주인공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에 카메라
포커스가 맞춰졌을 때 그 드라마의 서사는 보다 입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
는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변인물, 혹은 하위 주체라 불릴 만한 인물
들이 카메라 서술자에 의해 초점화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그러한 순간
에는, 보다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도 열릴 수 있다. 하위주체의 시선은 서사
의 주요 사건과 긴장의 의미를 또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들은 주인공과는 달리 드라마 서사 전체에서 보다 적은
비중을 차지하므로 그들의 시선이 초래하는 새로운 해석의 결과가 텍스트
에 일으키는 균열 또한 미미한 것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드라마의 서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만들 수도 있다. 카메라 서술자
에 의해 발생하는 이러한 ‘초점 인물의 다변화 양상’33)은 긴 서사를 이어가
는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다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역사드라마에
서라면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전복적 해석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영화 이론을 잘 몰라서 카메라 서술자 어쩌구는 나도 잘 몰겠다

 

 

 

카메라
서술자에 의한 초점인물의 다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역사에 대한 전복적 해
석의 가능성
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하위주체의 자기 재현의 순간들은 일종의 수행이며 따라서
단순한 언어가 아닌 존재 전체가 걸린 ‘사건’임35)을 보여주고 있다.

 

>>전복적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말 좋다

 

 

 

소이는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다 기억
하는 천재적 능력을 타고 난 인물이며, 놀라운 기억력으로 스스로 무형의
혜례본이 되어 한글 유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 ㅇㅁㅇ!!!! 우왕 소이

 

 

 

소이의 주장에 따르면 지배층의 어떤 ‘대의’는 피지배층을 죽이는 대의
이기도 하지만 때론 살리는 대의도 있다. 그녀는 세종의 한글창제가 진실
로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뜻
이라는 의미의 ‘대의’란, 그 단어 자체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운 것
이다.

 

 

 

이는 여성의 역할을 가족과 같은 사적 관계
에서의 희생과 봉사로 제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해
석될 수 있다. 채윤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권력의 문제
와 백성의 욕망을 말함에 비해 소이의 결정적 발화는 채윤에 대한 보다 개
인적인 돌봄과 임금에 대한 존경과 충심의 발로인 경우가 보다 지배적이
다. 이 드라마가 기존의 역사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하위주체의 역사 복
원을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이라는 여성의 재현에 있어서는 일정
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오호... 흥미로운 분석

 

 

좀더 열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 드라마는, ‘하위주
체-여성’이 공적인 역사와 사회문화에서 여하히 배제되고 타자화 되어 왔
는가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여성 ‘소이’를 통해 흥미롭
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오오..ㅇㅁㅇ

 

 

아이들이 놀이삼아
불러대는 ‘가갸거겨’ 노래를 통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는 자연스레 세상
에 퍼져가게 된다.44) 하위주체의 말하기란 이처럼 권력이 기획하거나 지
배 체제가 허용하는 것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마치 민요가 퍼져가듯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어느 새 그것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존재성을 획득하게
됨을,

 

 

 

심종수 (결연하게) 주상이 만든 글자가 결국 반포되어 퍼져나가고 있습
니다. 3대 본원이신 정기준 어르신께서 목숨을 다해 막으시려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밀본은 이 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성심을 다해... 온 성의를 다해 결사적
으로, 이 글자를 천시하고 천대해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 24회 50씬 )

 

 

훈민정음
반포와 유포를 끝까지 반대하며 “글자로 인해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더 많
이 속게 되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라는 밀본의 수장 정기준의 반박에, 세종
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하고 있었다.
이도 그들은 결국 그들의 지혜로 길을 모색해 갈 것이다.
매번 싸우고 또 싸워나갈 것이야. 어떤 땐 이기고, 어떤 땐 속기
도 하고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역사니까...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조와 지배자가 명멸했으나, 이 백성
은 수만 년 동안 변치 않고 이 땅에 살아 있으니까. 또... 싸우면
(차가운 미소로) 되니까.46)

 

 

>>이야~ 뿌나 봐야겠다

 

 

 

 

 

 

 

 

 

 

 

 

 

 

 

<<아 이 논문 읽으니까 세종대왕찡이 생각나면서 막 감동 될라고 해 한글은 짱이구여 세종대왕도 짱임ㅠㅠㅠ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