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설(私小說), 고백(告白)이라는 장치(裝置)
-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와 가사이 젠조(葛西善蔵)의 경우 -
姜宇 源 庸(關東大)
1. 들어가며
그렇다면 사소설의 어떤 점이 이와 같은 ‘지속’을 가능하게 만드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작
가는 무엇에 이끌려 사소설을 쓰며, 게다가 독자는 넋두리와 같은 작가의 ‘자기(自己)’ 이야기를 통해
어떤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것일까.2)
2) 작가에게는 자기(自己)의 이야기이지만, 독자에게는 남(他者)의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하게 만
드는 흡입력에는 남의 일 같지 않게 ‘만드는’ 사소설의 독특한 화법이 있어 보인다.
사소설을 둘러싼 연구 혹은 담론은 나카무라 무라오(中村武羅夫)의 「본격소설과 심경소설(本格小
説と心境小説と)」(1929년) 이후 우메자와 아유미(梅澤亜由美)의 『사소설의 기법(私小説の技法)』(2012
년)에 이르기까지 수 십 권에 이른다.3) 그 중에는 마치 필독서가 된 ‘고전’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명한 언설들이 ‘사소설’을 총괄하는 통쾌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연구의 층과 폭이
증가할수록 새로운 사소설의 의미와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고, 다양한 관점에서 ‘사소설론’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오히려 사소설 연구서의 수적인 증가야말로 사소설 정의의 불
가능성과 담론의 무의미성의 반증이 될 수 있다.
‘사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는 이번에는 일단 유보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수 없이 되풀이해
온 ‘사소설론’에 관한 시도가, 사실은 사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군의 경향을 일괄하거나 특정할 수 없
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설은 작가의 ‘사(私)’적인 동기로부터 성립된 작품인
만큼, 작품의 성격과 경향이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야마모토 겐
키치(山本健吉)의 『사소설작가론(私小説作家論)』(1943년)과 같은 작업이 사소설 연구에 가장 타당
한 방법일지 모른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을 추출하다보면 전체가 보이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만, 애초부터 어떤 정의 아래에 여러 작가를 꿰어 맞추다보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조각이 남기
마련이다.
>>참고할 것. 책. 논저.
2. ‘고백’을 위한 장치들
사소설에 관한 한 가지 오해가 있다. 다름 아닌 사소설은 작가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ありのまま)’ 재
현한 ‘사실’을 옮긴 글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소설’에 허구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믿음은 환상에 지
나지 않는다. 가령 작가가 하늘에 맹세코 한 점 거짓 없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고 스스로 굳게 다
짐할지언정, 글 속의 ‘나’는 이미 작가가 아닌 ‘작품속의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발표자는 보이는 것과 그리는 것, 혹은 존재하는 것과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는 복잡한
현상학을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일기를 쓸 때조차 쓰는 순간의 상황이나 감정에 의해 하루에 일어
났던 일의 선택이 개입되고 내용의 강약이 조절된다. ‘소설’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작가의 의도
에 따라 작품의 수위가 결정된다. 새로운 글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는 순간 이미 제재로써의 사건은
‘사실’의 조건을 상실한다. 기억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다시 조합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경험이 손을 통해 글로 표현될 때는 문장(예술)의 창출이라는 가공의 과정을 한
번 더 거치게 마련이다.4)
이와 같은 오해의 시작은 ‘있는 그대로’를 ‘사실’과 혼동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소설 작가가 추
구하는 ‘있는 그대로’란, 발생한 일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재현한다는 의미가 아닌, 발생한 일과 대면
하는 내면의 ‘진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의지의 표명에 가깝다.5) 때로는 진심을 호소하기 위해 경험
을 생생한 사실처럼, 혹은 불분명한 기억을 명확한 사실처럼 꾸미기도 한다. 심지어 사소설 작가는
스스로의 ‘거짓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사실에 허구를 조합하는 각색도 망설이지 않는다.
>>우와 굳굳. 인용?
이런 내면의 진심으로 개인의 개성과 가치가...
이렇듯 실증적으로도 사소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글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당
연한 논리이기에, 사실의 유무를 둘러싼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기존 사소설 연구
의 단점이라면 허구를 배제하거나, 사건의 진상 파악에만 초점을 맞추어 온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덕분에 사실관계의 증명여부보다 허구를 전제로 한 의미부여가 앞으로의 연구방향
에서 보다 중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작가 나름의 방식대로 토로하는 이야기ー그것을 작가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면ー, 그 고백
을 통해 작가가 무슨 말이 하고 싶고, 독자들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기 바라는지, ‘의도’를 둘러싼 논
의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다시 말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추궁하기보다, ‘허구’를 도입해서까지
‘진심’을 피력하는 의도에 방점을 찍는 일이다. 작가의 이야기, 그의 고백은 사실과 허구로 조합된 장
치이자 보이지 않는 내면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 사소설을 고백을 위한 장치로써 인정할 때, 비
로소 고백 속에 담겨진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굳굳 멋져요
3. 고백의 의미 – 다야마 가타이와 가사이 젠조의 경우
「이불」의 주된 내용은 중년의 남성 다케나카 도키오(竹中時雄)의 은밀하고 부끄러운 내면의 폭로
라고 할 수 있다. ‘그(渠)’에 대한 폭로는 동시에 작가 다야마 가타이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며, 고백은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도키오(時雄)는 고향으로 돌아간 요시코(芳子)가 사용하던
빈 방에 혼자 들어가 서랍에서 요시코의 머릿기름이 밴 리본을 꺼내 냄새를 맡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요시코가 입었던 잠옷과 덮고 자던 이불을 꺼내어 마음껏 그리운 체취를 맡는다. 그 순간 “성욕
과 비애와 절망감이 돌연 도키오의 가슴을 덮친다.” 마침내 “도키오는 요시코의 이불을 깔고, 요시코
의 잠옷을 입고, 요시코의 얼룩진 비로드의 차가운 옷깃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자신의 독특한 성적 취향인 페티시즘을 고백(coming-out)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다야마 가타이는 오카다 미치요의 체취로 얼룩진 잠옷에 실제로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
기는 했을까? 물론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항들이 작품 해석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는 없다.
만일 히라노 겐(平野謙)의 지적과 같이 이 장면에 작의가 개입되었다고 한다면, 내면에 존재하는 ‘진
심’을 부각시키기 위해 꾸며졌을 가능성이 크고, 혹은 실제로 행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페티시는 부차
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허구이든 사실이든 모든 행위 요소(장치)들이 일제히 가리키고
있는 한 가지는 ‘그’의 내면이 “성욕과 비애와 절망감”에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진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백(confession)의 본질은 내면의 진심에 있고, 진심 속에는 절망하는 ‘내’가 있으며, 그
절망 때문에 우는 ‘나’라는 부동의 사실을 피력하기 위해 페티시를 포함한 도키오의 행위가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12)
2011년도 니시무라 겐타로 돌아와 보자. 아쿠타가와상 수상 기념으로 『文藝春秋』에 수상자 인터
뷰가 실린다.14) 수상작 「고역열차(苦役列車)」에 담긴 내용의 90%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이지만,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 상당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사소설도 소설이기에 독자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독자의 즐거움이나 작가 자신의 즐거움을 의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예
를 들어 성욕, 식욕, 질투 등 인간의 본능을 처절할 정도로 ‘가감’ 없이 그리고 있는 니시무라의 사소
설이, 실제로는 읽히기 위해 가감(加減)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감과 같은 장치를 거침으로 인해 오히려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며, 자신의 처절한 행위 속
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나타난다. 사소설은 보이는 행위를 고백하지만, 궁극
적으로는 보이는 이면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진심’이나 ‘감흥’이나 ‘본능’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설작가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위한 장치로써 보이는 고백의 기능을 충분히 활용한다. 어
찌 보면 이 장치를 잘 활용하는 작가일수록, 고백의 의미나 가치가 뛰어난 사소설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곤 한다.
<<그럼 사소설이 인기 있고 재미 있는 이유 = 고백 때문 = 왜냐면 고백에는 진심이 드러나니까 = 공감, 수용
이런 것?
고백으로 접근한 건 좋지만 수용 기제로 연결시키기엔 약간 약한 느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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