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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어서 「사소설」의 인식과 번역 / 이한정

snachild 2013. 7. 23. 17:33

1. 서론
2. 「사소설」과 일본문학
3. 개인과 소설
4. 「나」의 한국어 번역
5. 결론

 

 

 

일본에서 사소설이라는 문학용어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무렵으로
1930년대에 사소설의 양식은 한국문학에 유입되어 사소설 양식을 받아들
인 창작이 나왔으며, 사소설을 둘러싼 담론이 한국 문학에서 형성되기도
했다.1)

1) 진영복 「한국근대소설과 사소설양식」 현대문학의 연구 ?한국문학연구학회, 2000.8, p.78

 

 

 

자신의 경험을 허구화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써 나가는 소설.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
이며, 원류는 자연주의 및 시라카바파(白樺派)의 문학
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일본문학의 주류 혹은 저류(底流)로서 현재
에 이르렀다. 작품 속에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는 수가 많으나 그 인
물이 3인칭으로 씌어진 경우라 할지라도 작가 자신이 분명할 경우에는
역시 사소설로 간주하였다.2)
독자는 이 문장을 통해 사소설이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이며, 주로 1
인칭의 「나」를 사용해 쓰여지며, 작자의 경험이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소설이란 말과 함께 일본 소설, 1인칭, 작자자
신의 이야기란 말이 연상될 것이다.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 이라는 점에 대해서 반론을 해야하나?

   사소설이라는 장르는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일 수는 있으나.. 사소설적인 것, 사소설적인 성격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발달해 간 것이 일본의 경우지

 

 

 

그렇다면 일본의 사소설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어떤 연구서와
문학비평서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1) 이토 세이 「도망노예와 가면신사」 나카무라 미쓰오 「풍속소설론」
히라노 겐 「사소설의 이율배반」 「전후의 사소설」 미요시 유키오
「사소설의 동향」 일본 사소설의 이해 ? 유은경편역(소화, 1997)
(2)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 박유하역(민음사, 1997)
(3) 고바야시 히데오 「사소설론」 비평의 이해 ? 백철편역(현음사, 1981),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 ? 유은경역(소화, 2002)
(4) 스즈키 토미 이야기된 자기 일본 근대의 사소설 언설 ? 한일문학연
구회역(생각의 나무, 2004)

 

>>하... 이걸 다 읽어야 하나..................... 읽어야겠지..

 

 

이 가운데에서 최초로 번역된 사소설에 관한 비평은 일본에서도 널리 알
려진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소설론」이다. 이 책을 편역한 백철은 「사소설
론」을 소개하는 간략한 편역자주에서 사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노;; 발췌문 보니 국한문혼용인듯;;; 안 볼랭;;

 

 

 

백철은 사소설을 「作家 개인의 心境적인 世界」를 표현한 「日本的인」소
설이라고 명확히 규정짓고 있다.

 

 

 

백철이 말한 한국문학과 사소설의 영향관계에 대해서는 1958년에 발표
된 박영준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영준은 해방이전의 작가들에 의해
사소설이 쓰였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現實에 對하여 批判 또는 抗拒
를 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自己個人의 身邊的인 이야기를 씀으로
作品을 무난하게 만들려는 傾向」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이 「現實逃避의 한 方法」으로 사소설을 썼다고 파악했다. 한국의
「수필」이 신변적이거나 시정적인 이야기로 엮어지는 것은 「身邊的인 私小
說의 影響」5)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소설과 수필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 보면, 사소설을 수필류에 비유해 폄하하고 있
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박영준이
사용한 「現實逃避」라는 말은 이미 같은 시기에 일본의 사소설을 현실도피
의 일종으로 본 이토 세이의 비평에 따른 것이다. 1948년에 발표한 글에
서 이토 세이는 일본 사소설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도피」6)라는 말

 

 

>>사소설에 대한 선행 연구사 등을 추려서 볼 때 좋은 논문인듯

 

 

을 사용했다. 박영준은 같은 말을 사용해 사소설을 설명하고 있지만, 사소
설이 일본에서 발생했다는 말은 일절 덧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소
설은 「個人의 告白的이고 身邊的인 이야기」를 쓰는데, 이것이 진실에 육
박하는 힘을 갖고 있을 리가 없으므로, 사소설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7)

 

>> 진실에 육박하는 힘을 갖고 있을 리가 없으므로 ---- 뭔소리임ㅡㅡ 무슨 근거로ㅡㅡ 개인이라? 진실이 뭔데? 오히려 지극히 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느끼고 체감할 수 있어야 진실다운 것 아냐?

 

 

 

박영준과 같은 해에 안수길도 사소설을 다룬 글을 쓰면서 「私小說的 傾
向이 머리를 들고 있는 요즘 우리 文壇」에서 사소설의 허용이 어느 한도에
서 가능한가를 되묻고 있다. 그는 사소설을 「作家가 裸體가 되어 自身의
꼴을 讀者 앞에 드러내 보이는 小說」이라고 정의하면서, 루소의 참회록
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나타나는 「告白體」가 사소설의
최초의 한 형태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백체는 사회에 대한 개인의 자각
에서 나온 것인데, 19세기의 자연주의를 거치면서 「그 思想的 根據를 喪
失한 채 日常生活의 瑣末描寫에 置重한 나머지 身邊雜記나 心境의 述懷」
로 나아갔다고 했다. 안수길의 사소설에 대한 인식은 박영준의 인식과 크
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안수길은 19세기의 자연주의를 운운하면서 사소
설이 일본적 자연주의라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소설이 서구의 자연주의
와 다른 형태로 발전한 일본적 자연주의의 사생아라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백철의 문장에서도 나온다.

 

>>사소설과 고백체

 

 

 

이와 같이 안수길도 박영준과 마찬가지로 사소설을 말하면서 일본문학을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作者가 作者個人의 이야기를 썼는
데, 그것이 讀者에게는 讀者自身의 이야기를 써 준 것같이 읽혀질 때 그것
은 社會化된 나이며 典型으로서의 「我」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社會化된 나」를 통해 사소설의 가능성을 말했다.8) 그런데 안수길이 사용
한 「社會化된 나」란 말은 이미 1935년에 발표된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

소설론」에서 사용된 말이다. 안수길이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소설론」을 따
라 사소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인용하는 루소나 괴테의 언급이 고
바야시 히데오의 문장에서 보인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고바야시 히데
오는 서구 자연주의와 다른 일본의 사소설이 리얼리즘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사회화된 나」9)로 설명하고 있었다. 박영준이나 안수길은 사소설
을 말하는 정보를 일본문학에서 가져오고 있었으며, 사소설이 일본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소설이 일본에
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문제삼지 않았다. 「現實逃避」의 수단이나 작가의
「身邊雜記」로써 사소설이 일본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한국문학에 나타난 사소설을 일본과 관련시키지 않았다.

 

>>'사회화된 나'

   갈등 때리게 만드는 부분ㅠㅠ

 


 

김우
종은 사소설이 「個人의 自敍傳이나 經驗談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한 個人으로서가 아니라 각각 그들의 민족의 커다란 運命을 말해주는 歷
史的 位置에 서서 主人公 「나」 속에 投影」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2)
사소설이 「個人」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지만, 개인은 민족이나 역사와 관련
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싫은데... 민족이나 역사와 관련된 개인은 사소설적 개인이 아니지 않나?

 

사소설이 작가 개인의 신변잡기를 기록한 것으
로 이해되면서, 여기에서는 작가의 이미지가 희박해지면서 소설에서 그려
지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사소설로 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 근대소설의 주류가 사소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사소설은 「작
자의 신변」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사소설을 설명하는 내용은
1958년의 박영준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최인훈은 사소설이 「예
술가 소설」이라고 전제한 뒤에, 사소설의 소재나 기술은 「소설의 본질적
지평을 포기한 것」과 다를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소설이 일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일본문학은 소설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작품
을 생산한 것이 된다.

 

>>;;;;;;;;;;;; 소설이란 게 뭐고 소설의 본질이 뭐기에...

  수필적이라는 비판과 맥락이 비슷한 건가?

  그럼 소설의 본질적 기능이란 무엇일까? 으?! 으?! 설마 문학사회학 같은 거?!

 

 

박영준이 신변잡기를 쓴다는 점에서 수필과 사소설
을 같은 부류로 보려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최인훈의 관점에서 보아도 사
소설에 대한 한국문학의 인식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명치 유신 후의 일본의 근대․현대문학은 주로 소설이었는데, 그 특색
을 필자는 대강 다음 세 가지로 개괄해 보았다. 첫째, 사(私)소설 요소.

둘째, 첫째 항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일본 민중과의 괴리. 셋째, 에로티
시즘. 물론 오늘의 일본소설 전체를 이상 세 가지 특색 속에 묶는 건
다소의 무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본 소설을 접하려고
들 때는 이 세 가지 점은 먼저 전제(前提)로서 인식하고 들 필요가 있
을 것 같다.14)

 

>>민중과의 괴리.. (문단 위주) 떄문에 대중 서사로 보기 힘든?

 

 

사소설이 근간을 이루는 일본 소설은 한국소설과 달리
「민중」에 대해 개인의 이야기에 침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암시를 내포하
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동향 속에서도
일본문학에서 오래 전부터의 특질인 ‘사소설(私小說:사생활의 긍정적인 묘
사를 통해 삶의 미묘한 여러 측면을 그려내는 것)’의 이념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17)고 언급

 

사소설을 「사적인 소설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로 보았
다. 일본에서 사소설을 말할 때 초점이 되는 작자의 문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사소설을 문학의 범주 안에서만 다루지 않고 일본 문화의 특
징을 읽을 수 있는 코드로 인식하고 있다 . 이와 같이 사소설을 일본문화를
읽는 요소로 보려는 경향이 근래에 한국에서 나타났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사소설을 개괄한 일본의 사소설 에서 안영희는 「일본 문학의 특수
성을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일본의 사소설」이라고 전제한 뒤, 일
본의 선(禪)사상에서 보이는 「개인의 인격」이 쉽게 변화하지 않는 요소라
든가, 독자들의 「엿보기 취미」와 관련하여 사소설을 일본문화의 독특한 현
상으로 파악했다.22)

 

22) 안영희 일본의 사소설 ?살림, 2006, p.3, 84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사소설의 인식에 관한 앙케이트 조사에서도 「사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 비교해서 어디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
에 「고백성이 있는 점, 작가의 실생활을 반영한 점, 개인의 체험에 의거한
점, 사회전체에 통용되기 보다는 자기자신에게 유용한 범위의 소설이라는
점」 등으로 답하면서, 「사적인 감각」에서 쓰여진 소설이 사소설이라고 했
다. 또한 장래에 사소설 작품이 쓰여질 가능성에 대해 묻는 설문에서 「앞
으로 개인주의가 진전될 것이므로 사소설이 쓰여질 것」이라든가 「한국은
집단적인 특수성이 강한 점도 있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해 사회적으로 표
현하는 방법이 다양해 지고 있기」 때문에 사소설의 형태를 띤 소설이 나타
날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23) 「고백성」이나 「작가의 실생활」이 반영된 것이
사소설이라는 회답은 일본에서 논의되어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진 사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주의」와 「개
인의 자유」를 사소설과 관련해 말하는 것은 일본에서 사소설을 말하는 인
식과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에
서 사소설은 「작가」의 신변을 이야기 한 것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일상을
쓴 소설로 인식
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는 사회와 유리된 「개인」
의 모습을 묘사한 소설을 사소설로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
까 생각된다.

 

>>사회와 유리된 개인!!

 

 

 

3인칭과 과거시제로 쓰여지는 소설에 대해 사소설로 대표되는 일본소설
은 주로 「1인칭과 현재시제」로 쓰여져, 「자신의 일상」이 소설의 「사건이며
플롯이 된다」는 인식이다. 1인칭 소설이야말로 작가의 신변을 들려주는 것
처럼 쓰여지는 사소설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다. 사소설의 형식과 의식적
으로 거리를 두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는 장애
를 갖고 태어난 큰아들을 모델로 한 단편과 장편을 쓰면서부터 이야기하는
내러티브에, ‘나’를 사소설의 방식으로 사용했다」25)고 말하는 것에서 1인칭
의 「나」가 지니는 사소설적 성격을 엿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인칭으로 쓰
인 사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어떤 장애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자.

 

>>1인칭의 나

   자기 중심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사소설로 보는 경향은 일본소설이 곧 사소설
이라는 막연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점차 개인이 중시되는 한국의
시대 변화 속에서 사회와 유리된 개인을 그린 소설이 사소설이라는 인식에
서 연유한다. 본래 일본에 기원을 둔 사소설은 「작자」의 신변을 쓴 것이며,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쓰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
면서 작자의 신변을 모르는 독자에게 그 의미는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
았다. 오히려 1인칭으로 서술되는 개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
국에서 사소설은 「작자」라는 수식어가 빠진 「개인」의 문제를 다룬 소설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사소설은 작자와 관계없는 한 개인이 1인칭의 「나」로

그려지는 소설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사소설의 발생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던 작자
의 이야기라는 요소가 희박해졌다. 사소설은 사회와 유리된 개인이 부각되
는 한국의 상황에서 작가의 신변과는 크게 상관없는 익명의 개인이 영위하
는 소소한 일상을 담담히 그린 소설로 인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좋다!(결론부) 인용할 수 있으면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