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의 족보로 시작한다. (......) 아마또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족보로 시작하는 것이, 다시 말해 구약시대부터 이어져온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예수를 통해 완성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33.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오고, <루가의 복음서>에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다.
“두 사건은 하나의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를 ‘왕’으로 본 것이고(물론 세속의 왕은 아니다), <루가의 복음서>는 ‘예언자’로 상징한 것이다. 이는 두 복음서의 공동체 성격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35.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떠나 작고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말에 귀 기울여야겠다. “정치적 중립은 가치중립적으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사람 곁에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겸 개혁정치인이었던 솔론은 이렇게 말했다.
36.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피해를 당한 사람과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
예수 탄생은 놀라운 선물이다. 하지만 아기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터뜨린 울음에도, 산통에 신음하던 마리아의 절규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잠을 자거나 자는 척했던 사람들을 기억해야겠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태연하게 살고 있다.
38
중동이라는 명칭은 영어의 미들 이스트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인데 서양 사람들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아시아 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남서쪽에 있다. 따라서 서아시아 혹은 서남아시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이제는 아예 고유한 지명으로 굳어졌지만, 사실 중동이라는 명칭은 오리엔탈리즘의 부끄러운 유산인 셈이다.
51-52.
‘나라’ 또는 ‘통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basileia는, 세속에서 쓰일 때 영토를 지닌 왕권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왕의 지위와 권세와 통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느님에 관해 말할 때에는 왕으로서의 하느님의 역할 또는 활동을 가리키며,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지배권을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나라라는 개념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어떤 영토나 공간이 아니라 품위와 권능을 갖춘 ‘하느님의 다스림’, 즉 하느님이 다스리고 행동하며 왕권을 드러내는 말이다.
60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 마치 장터에서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다. (루가 7.31-32, 마태 11.16-17)
83
사탄satan은 히브리어로 ‘대항하는 자’를 의미한다. 악마라는 뜻의 그리스어 ‘디아볼로스diabolos’는 ‘길 위에 장애물을 던지는 자’라는 뜻이다. 붓다는 악마를 ‘마라mara’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마라는 ‘살인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것은 참된 나를 죽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114
제자들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본다면 자존심이 상할 만큼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먼저 베드로는 어부였다. 당시 어부는 매우 낮은 평가와 대우를 받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일반 유대인들과는 달리 상당수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배를 타고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온전한 유대인으로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천시받았다고 한다. 예전 우리의 못된 어법으로 말하자면 ‘뱃놈’쯤 되었던 모양이다.
117
어째서 베드로는 그렇게 선뜻 예수를 따랐을까? 그리고 예수는 하필이면 왜 하찮은 어부를 당신의 첫 번째 제자로 삼았을까? 그건 아마도 예수가 가장 낮은, 그러니까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밑바닥의 보편성’과 일맥상통하는 거라고 여겨진다. 낮고 천한 사람을 골라 당신의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전하게 한 것이다. 그의 신분이며 재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사람됨과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걸 모범적으로 보여주려는 뜻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제자들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교만과 허위의 허물을 먼저 털어내야 한다는 속뜻이기도 하다.
118
예수는 가장 미천한 사람,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세금징수원처럼 기피되는 인물들까지 당신의 사도로 삼았다. 아무리 봐도 그럴듯한 인물이 별로 없다. 가롯 사람 유다가 그중 배움도 제법 차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실제로 대외적인 업무의 수행은 이 사람이 맡아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다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돈을 주고받은 것은 그가 본디 그런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22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의 신학자 겸 목살.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으로 1945년 4월 9일 나치정권 붕괴 직전 교수형을 당했다. ‘독일의 양심’으로 불린 그는 이념과 제도, 그리고 기복적 태도에 몰두한 신앙생활을 비판했다.
133
예수는 이러한 현실에서 아주 무모해 보이는 도발(?)을 감행했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만 봐도 숨낳은 여성이 나타난다. 당시 여성이 처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파격이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무리 지어 예수를 따랐으면 그렇게 흔하게 아무 거리낌 업싱 여인들의 일들이 기록되었겠는가?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거의 모든 모임에 여자들이 빠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나는 예수가 여자들에게 던진 메시지와 관심이야말로 하나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자reformer로서 예수의 면모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137
해방의 복음은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억눌린 사람, 멸시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 가장 많은 피억압자는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여자들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차별과 억압을 감당해야 했다.
140
요한 바오르 2세가 선종하기 여러 해 전 여성 사제를 교회에서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거기에 교황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을 ㅜㅅ 없다는 낡은 생각인 교황무류권(교황무류설)까지 들먹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교황무류설에 대한 회의만 키워줄 뿐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가 ‘영원히’ 금지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합리적으로 사고했다면 교회가 지금까지 지키고 따른 전통이었기에, 당장에 바꾸는 것은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시간을 두고 점진적이고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당위는 인정하지만 당장에는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고 천명했어야 한다. 이런 권면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러한 비판이 반 교회적이라고 한다면 나 개인적으로는 교계제도의 전면적 회의는 아니지만 상당한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후임자인 보수주의자 베네딕토 16게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교황 프란체스코는 다소 유연한 듯하지만 그도 여전히 여성 사제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141-142
이러한 예수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대우로 인해 초기 교회에는 뛰어난 여성 교회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완고한 남성주의자였던 바오로(바울)조차 여교우 페베를 겐크레아교회의 봉사자로 천거했다.(로마 16:1-2) 또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가리켜 ‘잘 알려진 사도들’이라고 했다.(로마 16:7) <사도행전>에는 두 사람이 부부로서 25년 이상 같이 전도여행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초기 교회에는 여성 사도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점차적으로 여성들의 성직계급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어려운 초기 전도 과정에서 여성들이 분명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권력으로 성장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서으이 자리를 박탈했던 거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것일 뿐이다. 예수의 삶과 거리가 먼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교회도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서 아무리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양성불평등의 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미 사회는 양성평등으로 향해 가고 있는데 어리석게도 교회는 여전히 불평등을 고수하고 있거나 모른 척 눙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143
여성 복사를 인정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기억한다면 한국 교회의 이러한 반여성적인 태도는 외부의 비판 이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환골탈태했어야 할 일이다. 오랫동안 이어온 전통이고 신자들에게 익숙할 뿐 아니라 교회법상 성문화된 것이라고 묵살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공의회 정신이 단순한 20세기 중반의 선언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실천명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그런 점에서 후반기의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틱토 16세는 사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교황들이다.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와 선포한 바오로 6세의 이름을 각각 조합한 그의 교황명은 공의회 정신을 계승 실천하겠다는 상징적 의미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외면은 반복음적이고 반공의회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0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검토하고 개방해서 그 진통을 최소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을 단순히 교회의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따르던 이전의 여제자들이나 초대 교회를 이끌던 여사도들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 것이며, 예수가 여자들에 대한태도의 변화를 촉구했던 것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165
유대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에 대한 일종의 불문율을 지녀왔다. 고아, 과부 등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공동체가 연대하여 지우너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 보면
166
그런 연대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매섭게 비판하는 대목들이 많다.
서인석의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바로 그런 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성찰이 번뜩였던 책이다.
173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 성전을 찾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크게 화를 내며 야단치는 장면이 보인다.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가 그렇게 화를 낸 경우를 본 적이 없기에 매우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174-175
순례자들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성전세, 제물. 성전세는 특별 제잔학 은전으로 내야만 했다. 통상적으로 유통하는 화폐가 아니었으니 반드시 환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성전 주변에 환전소가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에 ‘환전상’을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 그런 이권이 있으니 제사장들도 눈독 들여 환정상과 결탁. 독점권을 획득한 환전상들은 수수료를 더높게 책정. (...) 복음서에서 예수의 질책을 서술하면서 ‘강도의 소굴’에 작은따옴표가 있다는 점.
두번째 의무, 희생번제. 성전에 바치는 제물이니 가장 온전하고 흠결이 없는 제물이어야. 그걸 누가 구별하고 판단? 제사장. 즉 교회가 했던 것.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꼬투리 잡을 수 있음. 그러니 성전 근처의 ‘제사장 공인’ 따위의 신전 간판을 내건 가게서 사야 뒤탈이 없었던 것.
178
비둘기 장수들으 의자를 엎었다 -> 제물은 크게 양과 비둘기였다. 양은 부자들이 바칠 수 있는 제물. 보통 사람들은 비둘기... ‘양과 비둘기 장수’라고 하지 않고 오직 비둘기 장수의 의자만 엎었다는 건 바로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는 모리배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 예수가 그들의 의자를 엎었다는 건 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얄팍한 지갑마저 털어먹으려는 탐욕에 대한 회초리.
204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 -> 김해성 목사 집사 성추행 의혹
205
영등포 요셉병원 선우경식 원장 -> 선우경식 원장 떠난 후 분위기가 바뀜..
219
내가 예수를 따르기로 한 것이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때, 이것이야말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할 수 있는 실천이며 기적이 아닐까? 따라서 예수의 이 기적은 내게 그 기적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의 기적은 내게 그의 삶을 따르도록 하는 실천적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 그들에게 베푼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어찌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223
초모룽마 (세계의 모신) - 에베레스트 산
225
유일신의 유무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눈 것은 19세기 후반 진화론이 일반화되면서부터이다. 사실 유일신 종교는 크게 네 개로 볼 수 있다.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이다. 그런데 이들 종교는 모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오아시스와 사막으로 나뉘는 지리적 상황에서는 굳이 다양한 신이 없어도 된다.(물론 생활의 방식이 복잡해지고 다원화하면서 다신교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모세 시절의 유대인들도 상당수 다신교를 신봉했다.) 그러나 인도나 아마존 지역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에서는 유일신 개념이 통하기 어렵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신학적 입장을 떠나 문화적 입장에서 본다면 유일신 신앙이 결코 고등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최소한 그 정도의 유연성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233
북이스라엘 왕국에 속했던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에 정복된 이후 이민족들과 섞여 살았다. 그래서 순혈주의를 고수했던 남유다 왕구겡 속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게 아주 못마땅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자신들보다 나았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끌려갔으니 그들의 재산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던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점에서는 조금 꿀렸던 게 사실인 것 같다.
235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게 단지 ‘예수의 존재를 믿는다’는, 너무나 간단한 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그 가치와 의미를 더럽히고 깎아내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예수는 당신의 존재를 선언하고 그 존재성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선언이나 율법으로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기꺼이 사람의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람의 아들’의 진정한 의미다.
237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지적 “그리스도교는 단지 하느님을 숭배하거나 하느님을 창조자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인간의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254
‘가난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으로 결핍한 상태를 가리켜 가난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형태의 억압을 받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정신적 육체적 억압)
255
부족함이 없으면 일상의 평안함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삶이 편안하고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삶에 아쉬움과 어려움이 있을 때 하느님께 매달린다. 참 야박하고 얍삽한 처사다. 그러나 그런 태도마저 하느님은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다만 그냥 당장의 문제 해결이나 탈출을 위해서 매달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그런 삶에 얼마나 무의미하게 매달려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함으로써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마냥 타박만 할 일은 아니다. 이런 연약함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260
‘하느님나라’는 특정 공간 개념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정신과 방향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완성된 왕국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삶의 양식’이다.
264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 회복이다.
259
주기도문 - ‘일용할’ 양식. 내일이나 미래를 위한빵이 아니다. 내일을 이거나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매일의 양식을 하느님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 내일의 내 양식을 위해 저장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내 주머니에 쑤셔넣으려는일을 나는 얼마나 많이 하는가?
>>일용할 = 내가 먹고 살 만큼만
275
일찍이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율법의 경직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인간다운 참된 삶, 인간의 해방이 중심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280
희망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힘일 때 가치 있는 것이지 절망을 잊거나 보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82
최고의회는 “야훼의 이름을 모욕한 자는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는 <레위기> 24장 16절에 의거해서 예수의 사형을 요구했다.
(…)
바리사이파는 메시아의 존재, 영혼의 불멸, 천국과 천사의 존재를 받아들였으며 반헬레니즘적이었던 소수파였지만 민중들에게 존중받던 집단이었던 반면, 사두가이파는 모세오경에 적시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메시아, 영혼 불멸과 부활, 천국과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친헬레니즘적이었으며 다수파였고 집권층의 옹호를 받고 민중들에게는 외면을 받았을 만큼 두 세력은 철저하게 양극점에 서 있었다.
285
나는 가톨릭 교회의 자산은 전통이고, 개신교회의 자산은 개혁성과 민주성이라고 생각한다.
289
(예수처럼 살기) 부활을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먼저 나의 탐욕과 무지와 증오를 죽여야 한다.
290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죽음이다. 그릇된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292
예수 부활은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의 역사적 유일회성을 넘어 모든 시대의 인간을 위한 그의 보편적 의미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
예수의 부활은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이고 해방된 세상의 시작
302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라는 책
311
전태일(…) 그가 바로 1970년 한국에 왔던 세레자 요한이었다.
312-313
나 자신은 세례자 요한이 될 용기는 없다고 감히 고백한다. 그렇게 비겁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손으로 세레자 요한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지혜와 용기에 감사하기는커녕 욕하고 가두는 일에 앞장선다면 예수를 죽이려고 한 헤로데와 무엇이 다르며, 유다를 강제로 침입하고 무력으로 통치한 로마 점령군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또한 율법을 자신의 독점 권력이라고 착각하며 거짓과 위선을 일삼았던 사두가이나 바리사이와 무엇이 다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315쪽 <왜 한국 교회는 보수주의에 안주하는가?>
개신교의 기독교장로회와 감리교 일부, 예수교장로회의 통합 측 일부가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고, 가톨릭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쯤 된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316쪽
보수교단은 내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진보교단은 구체적인 인간구원을 주장한다. 따라서 보수교단이 개인의 평안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문제 등에 상대적으로 무심한 반면, 진보교단은 구체적 현실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사회적 구원에 관심을 갖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능적 측면에서도 보수교단은 제사장적 기능에 충실하지만 진보교단은 예언자적 기능에 충실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즉 내세의 개인의 영혼 구원과 사회적 복음 실천을 통한 총체적 인간의 구원으로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317
보수 교단은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고 천당에 간다고 주장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진보교단은 복음의 실천을 통해 구원되며 전도가 아니라 참된 인간의 실현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
보수 교단은 죽은 뒤 영생을 누리는 게 천당이라고 보지만, 진보교단은 하느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의로운 나라가 곧 하느님나라이며, 그것은 사후에 가는 천국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곳에서나 진보적 교회가 대규모로 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보수교단 일색인 경우도 드물 것이다.
317-318
성경에 대한 해석
보수주의 : 성경은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는 하느님의 절대적 계시. 루터의 종교개혁. ‘오직 성경뿐!’. 당시가톨릭 교회의 부패가 성경보다는 교황의 회칙이나 공의회 문헌 등을 더 중요시하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비판에서 기인. 이는 당시의 상황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 그러나 그 강조가 지나쳐 자칫 문자주의적 해석만 고수하는 편협성을 부작용으로 얻게 되었다.
진보주의 :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인정하되 그 명제의 숨은 뜻을 헤아리는 게 가장 중요. 인간의 언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오류도 있을 수 있음.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문자주의자 또는 축자주의자라고 비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입각한 자의적 해석으로 복음을 훼손한다고 비판.
예수에 대한 관점
보수 : 예수의 신성을 강조.
진보 : 인간으로서의 예수도 강조. 예수는 우리가 따르고 실천해야 할 모범.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예수를 폄하하고, 구원자이며 대속자인 메시아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치닫는다고 비난. <-진보주의자들이 메시아 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의 예수 해석이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정작 예수가 가르치고 성경이 전한 핵심을 내용으로 보지 않고 형식의 권위로 받아들인다고 볼 뿐.
그러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하는 감리교단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리수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며 참선도 기도의 일종이라고 한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장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1992년 결국 출교시켰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배타성을 무기로 삼는 한국 보수 개신교 목사들은 변선환 목사의 다원주의적 관점의 확산을 우려하던 중에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이따는 발언을 문제 삼아 목사직 파면은 물론이고 신자의 자격까지 박탈한 것이다. 그 재판이 열렸던 교회가 바로 금란교회였다.
320
이에 반해 진보교단은 하느님이 모든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현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은 당연히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보수교단은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지만 진보교단은 ‘먼저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빈곤계급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보수교단은 그 사람의 죄나 게으름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반면, 진보교단은 사회구조 악, 즉 사회적 불평등에 기인했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321
신학적 입장
보수교단 : 에반젤리컬(evangelical), 즉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구속사 신학에 온 초점을 맞춘 반면,
진보교단 : 에큐메니컬, 즉 교회일치의 틀 안에서 다양한 진보신하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세계사적 조류의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용하고, 조응하면서 신학적 사고를 심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는 입장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보수교단 :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 소극적. 교회 확장의 관점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
진보교단 :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시정을 위해 노력하는 편.
322
서구사회의 좌파와 우파가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큰 정부(많은 세금)와 작은 정부(적은 세금), 시장의 불완전성과 시장의 자율성, 기간 산업의 국유화와 민영화, 노동자의 이해 대변과 기업가의 이해 대변, 복지와 분배 대 발전과 안정 등으로 구별되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와 우파를 친공(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반공 혹은 비-반공)과 반공,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반폐쇄적 국제주의와 민족주의 등으로 구분하려는 태도 등 해방 이후 한국의 독특한 정치사의 변환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아마티아 센 <정체성과 폭력>
324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과연 좌파인가 우파인가? 사실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 자체가 참 한심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 교회는 예수의 사회정의에 대한 복음 선언에는 귀를 막은 채 근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보수 극우의 보루이며 교두보가 되고 있다는 것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문제다. 이미 하나의 거대권력으로 자리 잡은 한국의 교회는 이미 그 순간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겸허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썩은 중세 교회에 맞서 용감하게 개혁을 요구했던 루터의 정신이다. 그런 루터의 정신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신들을 절대적인 교조로 삼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반종교개혁적인 태도이고 반루터적인 자세다.
332
개방적인 입장인 자유주의 신학은 이전의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성서 해석을 비판하고 기술문명의 발전과 사회 전반의 근대화에 따라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36
근본주의 대표자인 매첸의 제자였던 박형룡 목사.
“금번 우리 교회가 W.C.C., 에큐메니컬운동을 거절하고 보수 양진영의 합동을 이룩한 것은 실로 고유의 근본주의 신앙을 견실히 수호, 실천, 전파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자로 세계 모든 교회의 통일을 지향하는 초교파적인 교회의 협의체다.
<<이 글을 읽다보니까, 한국 교회에서 보수 교단이 주류가 된 것은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좌파, 우파의 기준이 뒤틀려 있음. 좌파 자체가 친북이라는 식으로 힘을 잃었기 때문에, 한국 정치가 애초에 양당제이며 좌파가 없는 것처럼, 한국 교회 또한 극보수화된 것으로 보임.
341
그러나 이들 도시 노동자들이 겪는 억압과 착취에 대해 고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도시산업선교회(도산)가 그런 일에 나섰지만 이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냉대와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의 허물이 모두 면탈되는 것은 아니다.
면탈 : 죄를 벗다.
343
정치는 물질적 세계의 가장 큰 권력이고 종교는 정신적 세계를 지배한다. 그 둘이 합쳐서 권력으로 치닫게 되면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기본적 이상은 실현 불가능해진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또한 달라졌을듯. 정치만이 권력의 주류가 되지 않고, 오히려 기업이나 돈이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도 미디어나 문화의 영향력이 한결 커졌다고 볼 수 있다.
345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성직자가 살인 음모에 가담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었다. (실제로 본회퍼가 속한 교회에서도 감옥에 갇힌 그를 면회하지 않았다.) 본회퍼는 되물었다. “어떤 미친 작자가 큰 트럭을 몰고 인도로 돌진해서 사람들을 치어 죽이는데, 성직자라고 해서 그 죽은 사람들의 장례 에배나 치러야 한단 것인가? 트럭에 올라타 그 미친 작자를 끌어내 더 이상의 헛된 죽음은 막아야 할 것이 아닌가?” 복음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의 강령이다.
350
예수는 의도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반성과 사랑의 실천을 촉구한 예수의 메시지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감싸고 일깨운 예수의 언행은 당시의 권력자들 눈에는 거슬렸고 부담스러웠다. (…) 복음의 실천을 거부하거나 억압하는 정치에 대해 사랑의 실천과 함께 예언자적 가르침으로 맞서는 교회는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게 아니라 복음적이다.
351
해방신학 : 20세기 중후반 남미와 제3세계의 가톨릭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그리스도교 신학운동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했다. 즉,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의롭지 못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복음의 실체이며 올바른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열린 제2차 남미주교회의 이후 본격화되어 교회가 인류의 역사와 유대하여 빈곤한 사람들과 나라들이 부유한 사람들과 나라들에 종속된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1984년과 1986년에 교황청이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우려하는 경고 문건을 발표한 이후 급격히 위축되었다. 대표적 신학자로 구티에레즈 신부와 보프 신부가 있고 브라질의 카마라 주교가 그 중심인물이었다. 새로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가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해방신학에 대해 가장 냉소적이었다.
교회가 정치가들과 야합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그들의 불의를 눈감아줬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협력했기 때문에 사회와 민중이 신음하였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해방신학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352
정의구현사제단이나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해 교회가 취했던 태도는 냉담함이나 노골적인 억압이었다. (…) 이미 그러한 모습은 2008년 촛불집회 때 보수적인 추기경이 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 사제를 연이어 안식년에 전보한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 바 있다.
353
교회의 첫 번째 실천은 자기고백이다. 항상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사회가 그것을 따르는 모범이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354
막시밀리안 콜베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젊은 유태인 청년을 이해 대신 죽음을 택한 건 교회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358
우리가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인간의 자기이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종교는, 특히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계시종교로서의 단순한 자기이해뿐 아니라 거듭나는 삶, 참된 삶, 삶을 넘어선 영원의 삶으로 이끌어주는 표상이다.
기어츠는 종교를 네 가지 전망에 따른 네 가지 실체로 설명했다. 상식적 전망, 과학적 전망, 미학적 전망, 그리고 종교적 전망이 그것이다. 기어츠는 종교적 전망은 일상생활의 현실을 그저 있는 것과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현실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넓은 세계, 궁극적 세계 안에서 그 현실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현실과 사건의 참 모습을 만나고 투신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와 일상, 심지어 종교와 과학도 서로 충돌하는 상충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전망만 다를 뿐이다.
<<진보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글이 잘 읽히는 문체고 멋진 통찰이 많아서 좋았다.
<<아주 오랫동안 읽었던 책. 도서관 갈 때마다 쫌쫌따리 읽음. 홀로 책갈피(?) 해놓고 다음번에 가서 마저 읽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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