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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실존주의에서 주로 거론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중심으로 "실존, 혹은 실존한다"는 존재범주에 관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일반존재론적 분석을 주로 담은 [존재와 시간]의 부분적인 내용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1. 실존의 정의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어떠한 것에도 명확하게 적소되지 않으며 스스로가 물음속에 던져지는 존재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존재의 존재범주는 현존재가 아닌(실존하지 않는 존재자) 존재자와 차별적인 상태로 구분됩니다. 이것은 존재자의 "적소성"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범주 -
세계의 모든 존재자(예를들어 책상, 나무, 석탄, 자동차 등등)는 각각 구조적으로 본질을 가집니다. 그 본질이라 함은 세계에 어떻게 적소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객체의 본질을 논할때의 실존주의적 설명입니다. 적소된다 함은 그것이 그때에 그것이게끔 하는 유의의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적소성에 따라 용재자(도구적 존재자)와 전재자(객관적 관찰의 존재자)로 나뉘어 집니다. 이것은 실존하지 않는 존재자의 존재범주입니다. 나무나 자동차등의 존재자는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용재자와 전재자는 현존재가 각각 개별의 존재자를 대하고 있는 태도(하이데거에 의하면 "배려",와 "배시"로 나눕니다)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재자가 용재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들어 내가 어떤 호수를 보고 있다고 가정을 하면 그 호수는 나(현존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객관적인 호수 그 자체를 보고 있으면 그 호수는 전재자가 되는 셈이지요. 반면에 용재자와 같은 경우에는 현존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더 정확히 얘기를 하자면 현존재를 드러내는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나무로 못을 박아서 집을 만든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나무라는 존재자는 용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집을 만들어서 살아가기 위해(즉 어떠한 목적을 위해) 나무를 도구로 사용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현존재는 [세계 - 내 - 존재자]와는 다르게 세계속에서 스스로 어떠한 곳에 대하여 "적소의 가능성"을 가질 뿐, 현존재라는 존재자는 세계내의 다른 존재자와는 다르게 "어떠한 것에 의해서" 적소되는 성질의 존재자가 아닙니다. 오직 적소의 가능성을 가지지만, 명확하게 세계내의 다른 존재자와 같이 어떠한 것에서 의미, 혹은 본질이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현존재는 언제나 이 문제에 관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을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이데거가 언급한 현존재의 존재범주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인간만이 현존재일 수 있으며, 인간 중에서 오직 "나"라는 존재자만이 현존재일 수 있습니다. 현존재는 인간 전체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각각의 "나"라는 존재자입니다.
종래 형이상학이 세계를 중심으로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를 보았다면, 실존주의는 "현존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현존재는 세계 형성적]입니다.
2.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 형이상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형이상학적 사고체계를 해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현상학을 기초로 실존주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세계 보편의 진리, 즉 모든것을 모든것이게끔 하는 진리"를 바라보는 사고체계입니다. 형이상학에서 언제나 관심이 있는것은 보편성, 세계의 진리, 존재자의 본질입니다.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탐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세계 중심적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개별적 존재자(특히 "나"라는 존재자)는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적 언급은 이러한 사고체계에 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진리, 본질이라는 것은 그것이 설령 논증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존재물음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신, 우주의 법칙, 세계의 본질"을 논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양식에 변함을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현존재의 경우에는 이러한 진리로부터 영향을 받는것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에서 "신, 이성, 진리"등의 형이상학적 명제는 더이상 거론될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종교 또한 형이상학적 범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3. 사르트르의 주장.
사르트르의 사상은 현존재의 지향성에 따라서 전쟁 전, 후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경우 현존재의 일반존재론적 분석을 필두로 현존재의 일반존재론적 의미구현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만, 현존재의 현상학적 분석에 그치고 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이데거 본인도 인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르트르의 전쟁 전의 실존주의의 경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일반존재론적 분석에 있어서 입장차이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단지 사르트르는 현존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향성"에 관심을 둔 것이지요. 이러한 지향성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도 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현존재는 어떠한 것에서 의미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 형성적입니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언급한 "세계 형성적"인 표현과 일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존재론적 의미구현"에 있어서는 "선택"의 문제에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일차적으로 "선택"을 한 후에 그 선택한 것에 관해서 "일반존재론적으로" 의미를 형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 선택이라는 것은 잘못될(타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현존재는 언제나 "불안"한 존재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유로우나 선택해야 하는 존재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또다른 선택을 하고, 또 부정하는 매커니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에는 언제나 선택에 따른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유에로 선고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끝없는 선택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면서 지향하는 것입니다.
4. 하이데거가 주장한 것.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전면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도 거론되죠. 단지 각각의 개별적 "나"라는 존재자는 실존하는 현존상태이기 때문에 각각의 "나"는 일반존재론적으로 현존재를 분석하고, 이것을 토대로 현존재를 "일반존재론적(객관적)"으로 논증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세계의 진리를 구명해내기 전에 스스로 "나"라는 존재자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존재자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사고체계 자체를 "현존재"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이것을 통해서 현존재의 일반존재론적 의미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상당히 까다로운 책입니다. 여러가지 용어도 하이데거 스스로의 방식으로 나열하고 있지요.
사르트르는 1년간 독일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언급할 때에 각 철학자의 입장 이전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원론적인 문제를 접하시고자 한다면 하이데거를 먼저 접해보시는 쪽이 더 적합하리라 봅니다.
>>이 답변자 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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