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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굳은 결심이나 굳은 다짐을 뜻하는 사자성어

snachild 2013. 9. 29. 15:20
  • 굳은 결심이나 굳은 다짐을 뜻하는 사자성어
  • 굳은 결심이나 굳은 다짐을 뜻하는 사자성어 철연미천(鐵硯未穿) 굳은 의지로 업(業)을 바꾸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 오대(五代) 진(晉)나라의 상유한(桑維翰)이 쇠 벼루를 만들어 그 벼루가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학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데서 연유함. 유지경성(有志竟成)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수하 장수 경엄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고도 한다. 경엄은 원래 선비였는데, 무관들이 말을 타고 칼을 쓰며 무용을 자랑하는 광경을 본 뒤로 자신도 장차 대장군이 되어 공을 세우고자 마음먹었다. 나중에 유수(劉秀:훗날의 광무제)가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의 수하가 된 뒤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엄이 유수의 명을 받고 장보(張步)의 군대를 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보의 군대는 전력이 상당히 두터워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장보는 요처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경엄을 맞아 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렸다. 이에 장보가 직접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어지럽게 싸우는 가운데 경엄은 적군의 화살을 다리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고 통증도 심하였다. 그러자 경엄의 부하가 잠시 퇴각한 뒤에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경엄은 "승리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상을 영접하여야 마땅하거늘, 어찌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주상께 골칫거리를 남겨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장보를 공격하였다. 장보는 마침내 패하여 도망쳤다. 유수는 경엄이 부상을 당하고서도 분전하여 적을 물리친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 유수는 경엄을 칭찬하여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천하를 얻을 큰 계책을 건의할 때는 아득하여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뜻이 있는 자는 마침내 성공하는구려(將軍前在南陽, 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라고 말하였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함을 이르는 말.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거록(鋸鹿)에서 싸울 때, 강을 건너는 배를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려 죽을 각오(覺悟)로 싸워 크게 이긴 데서 연유함. 항우는 진(秦)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하기로 했다. 항우의 군대(軍隊)가 막 장하...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날마다행복73님 원글보기
메모 :

 

 

굳은 결심이나 굳은 다짐을 뜻하는 사자성어

 

철연미천(鐵硯未穿)

 

굳은 의지로 업(業)을 바꾸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 오대(五代) 진(晉)나라의 상유한(桑維翰)이 쇠 벼루를
만들어 그 벼루가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학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데서 연유함.


 

유지경성(有志竟成)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수하 장수 경엄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고도 한다. 경엄은 원래 선비였는데, 무관들이 말을 타고 칼을 쓰며 무용을 자랑하는 광경을 본 뒤로 자신도
장차 대장군이 되어 공을 세우고자 마음먹었다. 나중에 유수(劉秀:훗날의 광무제)가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
을 듣고 달려가 그의 수하가 된 뒤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엄이 유수의 명을 받고 장보(張步)의
군대를 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보의 군대는 전력이 상당히 두터워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장보는
요처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경엄을 맞아 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렸다. 이에 장보가 직접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어지럽게 싸우는 가운데 경엄은 적군의 화살을 다리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고
통증도 심하였다. 그러자 경엄의 부하가 잠시 퇴각한 뒤에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하자고 권하였다. 그러
나 경엄은 "승리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상을 영접하여야 마땅하거늘, 어찌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주상께
골칫거리를 남겨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장보를 공격하였다. 장보는 마침내 패
하여 도망쳤다. 유수는 경엄이 부상을 당하고서도 분전하여 적을 물리친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 유수는
경엄을 칭찬하여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천하를 얻을 큰 계책을 건의할 때는 아득하여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
으로 여겨졌는데, 뜻이 있는 자는 마침내 성공하는구려(將軍前在南陽, 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
成也)"라고 말하였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함을
이르는 말.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거록(鋸鹿)에서 싸울 때, 강을 건너는 배를 가라앉히고, 솥
과 시루를 깨뜨려 죽을 각오(覺悟)로 싸워 크게 이긴 데서 연유함. 항우는 진(秦)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
하기로 했다. 항우의 군대(軍隊)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였다. 항우는 갑자기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
라고 명령(命令)을 내리고, 뒤이어 싣고 온 솥마저도 깨뜨려 버리고 주위의 집들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3일 분의 식량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
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과연 병사들은 출진하라는 명령(命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아홉 번을 싸우는 동안 진(秦)나라의 주력 부대는 궤멸되고,
이를 계기로 항우는 제장(諸將)의 맹주가 되었다.

 


배수지진(背水之陣)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으로, ①물러설 곳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지경을 이르는 말 ②
물을 등지고 적과 싸울 진을 치는 진법.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제위에 오르기 2년 전, 한군을 이끌고 있던
한신(韓信)은 위(魏)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조(趙)로 진격(進擊)했다. 일 만의 군대(軍隊)는 강을 등지고 진을
쳤고 주력부대는 성문 가까이 공격해 들어갔다. 한신은 적이 성에서 나오자 패배를 가장하여 배수진까지 퇴각
을 하게 했고 한편으로는 조나라 군대(軍隊)가 성을 비우고 추격해 올 때 매복병을 시켜 성 안으로 잠입, 조
나라 기를 뽑고 한나라 깃발을 세우게 했다. 물을 등지고 진을 친(背水之陣) 한신의 군대(軍隊)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결사 항전을 하니 초나라 군대(軍隊)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한나라 기가 꽂힌 성을 보고 당황한 조나라 군대(軍隊)에게 한신의 부대가 맹공격을 퍼부어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한신은 군대(軍隊)
를 사지에 몰아 넣음으로써 결사 항전하게 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축연이 벌어졌을 때 부장
들은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고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을 등
지고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이것도 병법의 한 수로 병서에 자
신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음으로써 살 길을 찾을 수가 있다고 적혀 있지 않소. 그것을 잠시 응용한 것이 이번
의 배수진(背水陣)이오. 원래 우리 군은 원정을 계속하여 보강한 군사들이 대부분이니 이들을 생지에 두었다
면 그냥 흩어져 달아나 버렸을 것이오. 그래서 사지에다 몰아 넣은 것 뿐이오."이를 들은 모든 장수들이 탄복
(坦腹)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배수진을 쳤다'라는 말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죽기를 각
오(覺悟)하고 맞서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배성차일(背城借一)

 

목숨을 걸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다는 것을 이르는 말. '성을 등지고 한 차례의 기회로 삼는다'는 뜻으로, 목
숨을 바쳐 결사적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굳은 결심을 말한다. 비슷한 뜻으로는 '배수진(背水陣)'과 '파부침주
(破釜沈舟)' 등이 있다. 《좌씨전(左氏傳)》경공 2년조〉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제(齊)나라는 진(晉)·노(魯)·위(衛)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크게 패하였다. 진나라
의 장수 극극이 다시 제나라에 쳐들어가자, 제나라의 경공은 빈미인(賓媚人)을 파견하여 다시 싸울지라도 굴
복하지 말고 진나라와 화친을 맺게 하였다. 빈미인이 예물과 토지 문서를 가지고 진나라 군영으로 가서 화의
를 제안하자, 극극은 "제나라 땅에서 논밭의 길은 모두 동쪽으로 나도록 하여 진나라 병사들이 제나라를 편안
하게 지나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극극이 무리하게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은 빈미인은 "당신
들이 우리 제나라를 멸하지 않고 화친을 맺는다면 귀한 재물과 영토를 주겠지만, 쳐들어오면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병사들을 모아 성을 등지고 한바탕의 싸움을 청하여[請收合餘燼 背城借一]' 굴복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왕도 극극에게 제나라의 요구에 동의하기를 권유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성
아래에서 적과 일전(一戰)의 기회를 마련한다는 것으로, 죽음을 각오한 최후의 결전을 비유하는 말이다.

 

 
백절불요(百折不撓)

 

백 번 꺾여도 휘지 않는다는 뜻으로, 실패(失敗)를 거듭해도 뜻을 굽히지 않음. 한나라 때 교현이라는 사람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부하가 법을 어기자 즉각 사형에 처하였다. 또
태중대부 개승(蓋升)이 황제와 가깝다는 것을 믿고 백성들을 착취한 사실을 적발하여 처벌하도록 상소하였으
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나중에 황제가 태위(太尉)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현의 어린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가자, 양구(陽球)라는 장수가 즉시 관병을 데리고 구출하러
갔다. 그러나 관병은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봐 강도들을 포위하고만 있을 뿐 감히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였
다. 이 사실을 안 교현은 "강도는 법을 무시하고 날뛰는 무리들인데, 어찌 내 아들을 위하느라 그들을 놓아준
다는 말인가"라고 하며 몹시 화를 내면서 빨리 강도들을 잡으라고 관병을 다그쳤다. 결국 강도들은 모두 붙잡
혔으나, 교현의 어린 아들은 강도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몸을 던져 악에 대항하는 교현
을 존경하였다. 나중에 채옹이 교현을 위하여 〈태위교공비(太尉喬玄碑)>라는 비문을 지어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모를 지녔다(有百折不撓, 臨大節而不可奪之風)"라고
칭송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백절불요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뜻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불요불굴(不撓不屈)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 후한(後漢) 초기의 역
사가 반고(班固)가 지은, 기년체 역사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로, 반고가 《한서》에서 왕상(王商)에 대
해 “왕상의 사람 됨됨이는 질박하고 성격은 불요불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주위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
었다.”에서 유래한다. 불요불굴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시대 성제(成帝) 때 장안(長安)에
홍수가 들 것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제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물었다. 성제의 장인인 왕봉(王鳳)은 조사도 해보지 않고 시급히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상만
은 헛소문이라고 왕봉의 의견에 조금도 굽히거나 꺾이지 않고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후 왕상의 의견이 정확하
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에 성제는 왕상을 신임하게 되었고, 왕봉을 불신하게 되었는데 왕봉은 왕상
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또 왕봉의 일족인 양융이 실정(失政)하여 백성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를 문제삼아
왕봉의 선처에도 불구하고 왕상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양융은 파면되었다. 객관적이고 공
명정대한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왕상의 성품을 말한 데서 불요불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보통 불
요불굴을 말하기는 좋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공적인 위치에 있을 경우 불요불굴이라는 고
사성어를 더욱 절실히 새겨 두어야 한다. 불요불굴은 대쪽같이 곧고 올바른 성품과 일맥상통하다.

 

 
위무불굴(威武不屈)

 

어떠한 무력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함을 이르는 한자성어. 어떠한 위엄이나 무력에도 굴복하거나 꺾이
지 않을 정도로 위풍당당함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하〉 '공손연장의장(公孫衍張儀章)'에 나온
다. 종횡가(縱橫家)의 학자인 경춘(景春)이 공손연과 장의의 위세를 예로 들어 그들이 진정한 대장부(大丈夫)
라고 하자, 맹자가 진정한 대장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천하의 넓은 집에 살면서, 천하의 올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한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
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도 그 마음을 흩뜨리지 못하고, 빈천도 그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위력이나 무력
도 그를 굽히게 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고 하는 것입니다(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위무불
굴은 위의 '위무불능굴'에서 취한 것이다. 좁게는 어떤 위엄이나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넓게는
부귀 공명이나 빈천, 위협 등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대장부의 크고 떳떳한 기상을 이르는 말이다.


 

칠전팔기(七顚八起)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뜻으로, 실패를 거듭하여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섬. 일곱 번 넘어
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뜻으로,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결코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계속 분투 노력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삼전사기·사전오기·오전육기·육전칠기·팔전구기라고도 쓰며, 모두 실패에 굽히지 않
고 다시 분투 노력한다는 뜻이다.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백절불굴(百折不屈)·백절불요(百折不搖),
어떠한 위력이나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위무불굴(威武不屈), 결코 휘지도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의
불요불굴(不撓不屈)도 칠전팔기와 뜻이 통한다. 그 밖에 견인불발(堅忍不拔: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칠전팔기와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뜻으
로 흔히 쓰는 '오뚝이 정신'도 칠전팔기와 같은 뜻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말로, 남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
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 옛날, 중국의 북산(北山)에 우공이라는 90세 된 노인이 있었는데, 태행산(太
行山)과 왕옥산(王屋山) 사이에 살고 있었다. 이 산은 사방이 700리,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큰 산으로, 북쪽
이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다. 우공이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저 험한 산을 평평하게 하여 예주
(豫州)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는 동시에 한수(漢水)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
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이 반대하며 말했다. "당신 힘으로는 조그만 언덕 하나 파헤치기도 어려운
데, 어찌 이 큰 산을 깎아 내려는 겁니까? 또, 파낸 흙은 어찌하시렵니까?" 우공은 흙은 발해(渤海)에다 버리
겠다며 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와 광주리 등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황
해 근처의 지수라는 사람이 그를 비웃었지만 우공은 "내 비록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남을 테고, 아들은 손자를 낳고……. 이렇게 자자손손 이어 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저 산이 평평해 질 날이 오
겠지."하고 태연히 말했다. 한편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 자신들의 거처가 없어질 형편이라 천제에게 호
소했더니, 천제는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하여 역신(力神) 과아씨(夸蛾氏)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두 산을 하나는
삭동(朔東)에, 또 하나는 옹남(雍南)에 옮겨 놓게 했다고 한다.

 

제하분주(濟河焚舟)

 

적을 치러 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너고 나서는 그 배를 태워버린다는 뜻으로, 필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함
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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